봄날 ‘시’처럼 날카롭게 시대를 관통하다

지난 5월 28일 신촌 현대백화점 유플렉스에서 열린 영화 '시'의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윤정희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phto@dalypot@co.kr

지난 5월 23일은 이창동 감독에게 특별했다. 자신의 5번째 영화 ‘시’가 칸영화제에서 ‘극본상’을(현지시각) 수상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1주년이 있던 날이었기 때문. 쏟아지는 찬사에도 좀처럼 내색하지 않는 이 감독도 이날만큼은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귀국 후 바로 봉화마을을 방문할 만큼 그의 마음 한켠에는 떠난 님에 대한 슬픔도 함께 교차하고 있었다. 이처럼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의 수많은 감성을 글로, 영상으로 끊임없이 전달하는 이 시대의 감성, 이창동 감독의 삶은 드라마틱 했다. 한때는 연극 연출자 및 배우로, 국어 교사로,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이 감독.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작품 세계를 재조명 해봤다.


배고팠지만 꿈을 잃지 않았던 대구 소년

이창동 감독은 195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뼈대 있던 선비 집안의 가족은 개성이 넘쳤다.

좌파적 이상주의였던 아버지와 달변가 어머니, 그 속에서 태어난 4형제는 하나같이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 지독한 가난의 늪에서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이상을 좇고 또 좇았다.

이 감독은 한 영화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나에겐 근거 없는 엘리트주의가 있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것은 미적이며 도덕적인 자부심으로 변해갔다”며 “그러한 자부심은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4형제는 고집스러울 만큼 ‘골수’문화인의 삶을 걸어갔다.

특히 첫째 형의 연극 진출은 이 감독이 영화감독의 길로 들어서는데 초석이 됐다.

이 감독은 여덟 살 때부터 큰형의 연극을 보러 다녔다. 당시 극단을 창단한 큰형을 도와 새벽같이 연극 포스터를 붙이는 등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연극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연극사랑은 연기로까지 이어졌다.

평소 말수가 적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연기를 한다는 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무대 위 그는 진짜 배우였다.

완벽한 대사처리와 섬세한 감정표현까지 흠잡을 것이 없는 그의 연기는 간혹 기성 연극인들조차 머쓱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연기보다 이 감독이 진짜 하고 싶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수단은 ‘글’이었다. 그는 소설가 조선희와의 인터뷰에서, 무엇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냐는 질문에 “외로움”이라며 그에게 글은 “누구한테 보여준 적은 없지만 내가 그 무엇과 통신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글의 대한 애착은 그를 평생 글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경북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81년부터 86년까지 영양고등학교와 신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또한, 이 시절 쓴 소설 <전리>가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에 ‘소시’ ‘끈’ ‘운명에 관하여’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을 발표해 자신의 문학세계를 알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쌓아올린 문학적 감수성과 일상에 대한 섬세한 고찰력이 있었기에 이 감독은 영화계에서 연출부나 조연출로 활동해 데뷔하는 과정 없이도 영화감독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영화, 이창동을 만나다

하지만 전업 작가로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2권의 창작집을 냈지만 결국 장편은 쓰지 못했다. 소설가로서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이때부터 그는 소설대신 영화로 눈을 돌렸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셋.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마음을 다졌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항상 엄격함을 유지하겠다는 그의 신념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그는 지난 5월 26일 오후 6시 신촌 현대백화점 유플렉스에서 열린 ‘시’ 기자 간담회에서도 이런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번 영화의 만족도와 나르시즘에 빠지지 않도록 어떤 노력을 하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도 (내 작품에)허물만 보인다”며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나는 내 작품에 대해서는 병적으로 소심한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지금 생각하는 허물이 잊히는 때도 있겠지만 사실은 잊히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타고난 글 솜씨와 집착에 가까운 꼼꼼한 연출력을 갖춘 이 감독으로 인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서막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감독이 처음으로 영화에 입문한 것은 1993년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과 조감독을 맡으면서다. 이후 그는 1995년에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각본으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받아 영화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는 영화배우 문성근, 명계남 등과 함께 영화사 ‘이스트필름’을 세웠다.

그리고 먼 길을 돌아 그는 드디어 ‘초록물고기’로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단번에 각인시켰다.

한석규의 출세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도시화의 어두운 면을 탁월하게 묘사해 그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신인감독상·각본상과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감독상, 캐나다 밴쿠버국제영화제 용호상 등 국내외에서 상을 휩쓸며 찬사를 받았다.

누군가는 그를 ‘글 잘 쓰는 시나리오 작가로 남는 게 좋지 않겠냐’우려했다. 하지만 우려는 우려일 뿐 이 감독의 영화등단은 한국 영화계에 큰 축복이었다. ‘초록물고기’이후 그는 명실공이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9년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타락하는 남자를 그린 두번째 작품 ‘박하사탕’을 발표하면서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때부터 이 감독은 그와는 뗄 수 없는 그 곳, ‘칸영화제’와 인연이 닿기 시작했다.

특히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가 “나 돌아갈래”라며 외치는 장면은 아직도 관객들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있다. 설경구 역시 이 영화 한편으로 최고의 배우 반열에 들어섰다.

한석규, 설경구에 이은 행운의 주인공은 ‘문소리’였다. 이 감독의 2002년 영화 ‘오아시스’에서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역할을 신들린 듯 연기한 문소리는 그 해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신인배우상을 받았다. 문소리 연기에 반한 외신은 그녀가 실제 중증 뇌성마비 환자가 아니냐고 묻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그만큼 이 감독은 시나리오 집필과 연출력 외에도 문소리 설경구와 같이 숨겨진 보석들을 발굴한 일등 공신이다.

‘오아시스’로 이 감독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수상해 세계적인 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시장성에만 급급해 하락세에 접어들었던 한국영화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그 후 발표한 ‘밀양’은 배우 전도연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최근 개봉 한 ‘시’ 역시 오랜 기간 영화계를 떠나있던 배우 윤정희에게 제 2의 전성기를 선사했다.

이 감독은 ‘시’로 제63회 칸영화제에서 ‘극본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번 작품에 대해 지난 5월 26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시’는 마음에 대한 영화다. 시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듯 이 영화도 그런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단순히 재미와 상업성을 노리지 않고 치밀하게 시대정신을 연구하고, 관객과 소통하려는 그의 의지가 이번 영화에서도 발현된 셈이다. 그것이 그가 한국의 관객은 물론이며, 전 세계인들의 감성을 매만질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고위공직자에서 다시 영화감독으로

칸의 영광을 뒤로하고 이창동 감독은 지난 5월 26일 귀국하자마자 봉화마을로 떠났다.

그는 이날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23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주기였는데 참석하지 못해 도리를 다하기 위해 가게 됐다”고 짧게만 대답했다. 또한, ‘시’ 영화 속 자작시 ‘아네스의 노래’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시 같다는 의견에 대해 “관객에 따라서는 자기가 아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나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것은 관객의 자유이고 내가 결정해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토록 언론이 그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감독은 2003년 2월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 잠시 영화계를 떠났다. 당시 그는 기존의 정치인과는 달리 레저용 승용차를 직접 몰고 노타이 차림으로 격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선보여 세간에 화제를 모았다.

뿐만 아니다. 그는 모든 불필요한 ‘장관 행세’를 거부했다.

항공편을 이용할 때도 일반석을 고집했고, 그냥 지나도 된다는 공황 직원의 말에도 굳이 검색대를 통과했다. 천성적으로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 일화다. 그러나 초기 대중의 기대와 달리 그의 정치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특히, 감독 시절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을 했던 그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스크린쿼터 축소를 발표하는 등 그간 쌓아온 ‘영화감독’으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됐다. 또한, 부족한 행정 경험과 문화 외에 관광이나 체육, 청소년 분양에 대한 이해도가 미숙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에 일간에서는 “훌륭한 영화감독 하나만 잃었다”는 쓴 소리가 쏟아졌다.

결국, 이 감독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서 1년 4개월이란 짧은 임기를 마치고 다시 영화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영화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일어섰다. 복귀작 ‘밀양’은 그를 ‘역시 이창동이다’라는 찬사와 함께 다시한번 한국 영화 위상을 높였다.

이제 이창동 감독은 한국 영화의 거장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스토리텔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고 있다. 때론 자신에게 자학할 정도로 완벽한 영화만을 고집하는 이 감독의 창작 세계는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자신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이창동 감독.

무뚝뚝한 말투와 고독한 그의 눈빛 너머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세상에 가장 전하고 싶은 고백이자 메시지가 아닐까.

[김수정 기자] hohokim@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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