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모던 락의 개척자 “대중음악사의 새 역사를 쓰다”


델리 스파이스의 등장은 한국에서 모던 록 이라는 장르가 자리매김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들이 등장한 1990년대 중후반 홍익대학교 앞 인디신은 펑크(punk), 하드코어가 주를 이뤘다. 미국 시애틀에서 출발한 얼터너티브 즉, ‘시애틀 그런지’ 열풍을 이어받은 ‘콘’, ‘림프 비즈킷’ 같은 뉴메틀 밴드의 대성공은 한국 인디음악 판도를 점령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델리 스파이스가 들고 온 음악은 신선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제 중견 밴드로 우뚝 선 그들의 발자취를 쫓아가봤다.

델리 스파이스는 현재 3인조 라인업이지만 처음에는 김민규(보컬·기타), 윤준호(베이스·보컬), 오인록(드럼), 이승기(키보드)의 4인조 밴드로 시작했다. 이들이 처음 의기투합하게 된 계기는 인터넷이 활성화 되지 않던 당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던 PC통신 하이텔을 통해서다.

록음악 동호회 ‘모소모’에서 활동하던 김민규는 1993년 밴드 구인광고를 내고 밴드 결성을 시도했다. 이렇게 결성된 델리 스파이스는 1997년 그들의 1집 앨범 ‘Deli spice’를 발표하고 인디계에 혜성 같이 등장했다. 이 앨범에는 한국 모던록의 고전이 돼 버린 ‘차우차우-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수록돼 있다. 말랑말랑한 기타 생톤에 단조로운 아르페지오 주법을 배경으로 차분한 분위기와 폭발적인 사운드가 교차한다. 이 앨범은 경향신문사에서 실시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9위 오르기도 했다. 델리 스파이스의 음악적 뿌리는 영국 사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영국에서 라디오헤드와 블러, 오아시스의 출현은 ‘브릿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브릿팝 전성시대를 열었다. 델리 스파이스의 4집 앨범 ‘D’의 수록곡 ‘항상 엔진을 켜둘게’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브릿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중심에는 ‘스미스(the smiths)’가 자리 잡고 있다. 김민규와 윤준호를 스미스의 모리세이와 자니 마의 카리스마에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에서 스미스의 향수가 배어나온 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후 델리 스파이스는 영국적 사운드를 김광석 등 한국의 당대 음악인들의 감성을 버무려 자신들만의 특색있는 색깔을 창조해 냈다. 처음 델리 스파이스가 등장할 당시 한국 인디음악계는 헤비메틀을 거쳐 펑크, 하드코어가 주류를 이뤘는데 그 판도가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브릿팝 성향으로 뒤집혔다. 델리 스파이스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유명세를 탄 밴드 넬도 사실 델리 스파이스가 발굴해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델리 스파이스의 특색 중 하나는 밴드 멤버 모두가 작곡에 참여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졌다. 1집은 2명의 보컬 구성으로 녹음됐다. 총 11곡 중 디스토션 사운드가 돋보이는 첫 곡 ‘노 캐리어’와 ‘오랫만의 외출’ 2곡은 윤준호의 작품이고, 나머지 9곡은 모두 김민규가 작곡했다. 5집 ‘espresso’에서는 감미로운 발라드 ‘어린 나의 왕자에게’는 드러머 최재혁의 작품이다. 특히 리더 김민규의 탁월한 작곡 감각은 전 앨범마다 주옥같은 명곡을 쏟아냈다. 1집의 ‘차우차우-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90년대를 대표하는 모던 록 명곡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대와 자신들의 현실을 자조적으로 읊조린 3집 앨범 ‘슬프지만 진실’의 수록곡 ‘고양이와 새에 관한 진실’, 4집의 ‘항상 엔진을 켜둘게’, 5집 ‘고백’의 감수성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델리 스파이스의 멤버 전원은 각자 다른 프로젝트 밴드에서 활동하며 음악적 성과를 보이고 있다.

리더 김민규는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 ‘스위트피’라는 이름으로 델리 스파이스와는 별도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스위트피의 첫 EP앨범 ‘달에서의 9년’은 음반 수집가들 사이에 상당한 고가에 팔려 나가며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인디 레이블 ‘문라이즈’를 설립해 비슷한 성향의 음악인들을 결집하고 인디 음악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다. 윤준호와 최재혁은 밴드 ‘오메가 3’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창구를 통해 자신들의 음악적 역량을 이어나가는 델리 스파이스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새로 써나가고 있다.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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