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백호주의(白濠主義) 부르짖는 호주 선택해서 갔다”
“군인 출신 대사는 보내지 말아달라고 했다”

- 그 당시에 인권외교,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으로 한·미 관계가 어려워지면서 최고지도자로서 미국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셨던 것 같다.

▲ 많았다. 그동안에 1970년대 들어와서 한·미 관계에 있어서 박동진 장관이 불편한 관계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박동선 사건 등 여러 가지 사건을 겪었다. 그 다음에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있었다. 그 모든 문제가 마무리돼서 결국은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다. 그런데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도 끝내 철군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고 돌아가서 철군 문제를 철회했다. 또 그 과정에서 존 싱글러브 장군의 발언 문제도 있다. UN군 8군 참모장을 하던 싱글러브 장군이 카터 대통령의 철군 문제에 반대했는데, 언론에 그 이야기가 크게 보도돼서 결국 본국에 소환된 사건도 있었다.

- 그 당시에 일본은 오히라 내각 때였지 않나. 일본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이었나.

▲ 일본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서는 반대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 장관님께서는 호주 참사관으로 1971년 말부터 1974년 10월까지 거의 3년간 근무를 하셨다. 방금 말씀을 들어보면 그 당시에 닉슨독트린이 결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가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전에 한·일 관계, 그리고 한·호주 관계는 거의 동맹관계에 필적할 만큼 같은 진영에 속하고 있었다.

▲ 그렇다.

- 닉슨독트린이 나온 이후에는 일본도 호주도 그전과는 다른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의지가 강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호주에서도 역시 그러한 움직임이 감지됐을 거 같은데 어떤가.

▲ 호주는 좀 다르다. 정권교체가 있었으니까. 같은 정권에서 정책의 방향을 트는 것과, 완전히 다른 정권이 들어서는 건 다르다. 그래서 아까 동북아과장으로 있으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 보면서 또 무슨 일이 터졌나 항상 전전긍긍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지 않느냐. 그렇게 북한 문제에 시달리다 보니까, 북한 문제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참전 16개국이고 보수정권이 쥐고 있고, 백호주의를 부르짖는 가장 보수적인 호주를 택해서 갔다. 봄에 갔는데, 부활절 기간이었다. 그래서 이사도 못하고 호텔에서 1주일을 있었다.
그때 신문을 보니까 12월에 총선거가 있는데 노동당이 우세하다는 관측들이 있었다. 그런데 1949년부터는 보수당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23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느냐 하는 판국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보수당을 이끄는 윌리엄 맥마흔 총리는, 외국 사람인 제 눈으로 봐도 카리스마가 약했다. 그런데 고프 휘틀럼 노동당 당수는 언뜻 보기에도 위풍당당하고 말하는 데도 굉장히 대중에게 인기 있을 것 같은 면모가 있었다. 표는 인심인데, 표심이 휘틀럼 쪽으로 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한편 우리 대사관은 완전히 보수정권하에 안주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UN에서 우리를 지지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호주에 우리 상품을 하나라도 더 수출하는 거였다. 경제면에 눈이 밝았을 뿐, 정치는 완전히 따놓은 수표 같은 상황이었고 노동당과의 접촉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지고, 또 노스 코리안 노이로제가 걸릴 상황이 된 거다. 아니나 다를까 12월 22일 주말에 선거가 있었는데, 총선거 결과가 완전히 보수당 참패였다. 그렇게 휘틀럽 정권이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당장 선언한 게 중국과의 국교 수립이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중화민국대사관을 폐쇄하고 베이징 정권을 승인하는 조치를 취하더라. 그러니까 다음에는 북한 문제가 대두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때 마침 제가 대사관의 차석이었기 때문에 차석들이 모이는 ‘아시아 세컨드 맨 그룹’이라는, 한 달에 한두 번씩 호주의 저명인사들을 연사로 초청해서 점심을 하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게 노동당 계통 사람으로는 밥 호크라고 하는 호주 노동당 총연맹 의장이었다.
그리고 스티븐 피츠제럴드 교수라고 캔버라에 있는 호주국립대학교의 중국 전문가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후에 타스마니아의 고향에 갔다 돌아온 피츠제럴드 교수에게 찾아가서 “북한 문제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더니, “지금 호주는 스위치모드에 플러그가 들어가 있는데 북한만 딱 빈 칸이다”라고 하는 거다. 호주 외무성에 들어가서 북한 문제를 타진하면 다들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모른 체하는 거다. 피츠제럴드 교수가 이때 바로 주중대사로 임명이 됐는데, “the next move is North Korea”라 한다. 그때 와 계시던 민충식 대사는 주일대사관 경제사절단 단장으로, 경제공사였다. 동시에 경제협력 문제를 다루는 경제협력단이 있어서 그 단장으로도 계셨다. 일본에서도 같이 근무했던 분인데, 이분이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서울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한전 사장으로 가시게 됐다. 그렇게 공석이 되고 제가 샤제, 즉 대사대리가 됐는데 이런 사태가 일어난 거다.
그래서 정부에 “빨리 대사를 보내주십시오. 그래도 군인 출신 대사는 보내지 마십시오. 군인 출신이 오셨다가는 여기에 발도 못 붙입니다”라고 했다. 그때 군인 출신 대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스웨덴에도 군인 출신 대사들이 가계셨다. 그래서 주재국 정부에서 리셉션이 썩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당시가 김용식 장관이 계실 땐데, 이런 사정을 보셨는지 노석찬 주브라질대사를 주호주대사로 임명하셨다. 그래서 급히 이분이 서울에 도착했는데, 토요일에 박정희 대통령과 골프를 치고 곧바로 비행기 타고 시드니에 도착을 한 거다. 노석찬 대사는 저도 알고 있던 분이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그 부인이 정일권 총리 사무실에 계셨고, 문공부차관 할 때니까 그 사무실에서 가끔 만나서 알고 있었다.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힘들어 죽겠다고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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