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후계자’ 박지원 원내대표 리더십

지난 4일 민주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첫번째 회의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 정책과 대북정책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9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박 원내대표는 정세균 전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지난 8월 2일 총사퇴하면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9월 새 지도부 출범 전까지 당을 끌고 갈 임무를 맡게 됐다. 특히 당 안팎에서는 그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당권 경쟁의 소용돌이에서 리더십을 발휘, 당내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고 전대 준비기구와 세부 규칙 등을 둘러싼 계파 간 갈등을 원만하게 조정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그는 앞서 여야가 극한 대립까지 갈 수 있었던 세종시 정국과 집회 및 시위법 처리과정 등에서 특유의 지략과 용인술로 실익과 명분을 동시에 챙기며 정치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때문에 벌써부터 ‘박지원 리더십’에 대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다.

박지원 원내대표가 7·28 재·보선 패배의 늪에 빠진 민주당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민주당 지도부가 지난 2일 밤 총사퇴하고 한달여간 당을 이끌 비상대책위원장에 박 원내대표가 선임되면서 원내와 당권이 모두 그의 손에 맡겨졌다.

다음달 12일쯤으로 예고된 전당대회의 관리자로서, 국정 현안도 산적한 8월 정국에서 그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정치인 박지원’으로서 체급을 한 단계 높일 기회를 잡은 것이기도 하다.

박 원내대표는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비대위원장으로서 첫 일성을 내놨다. 그는 “우리가 지방선거 승리감에 도취되고 한나라당의 엄살작전에 안이해져 국민에게 심판받았다”며 “처절히 반성하고 이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박 원내대표는 이날 ‘쇄신연대’의 추천을 받아 박영선·강창일 의원을 추가한 비대위 인선을 마쳤다. 격주로 의원총회를 열어 당내 의견수렴과 소통도 막힘없이 하겠다는 구상이다.

그의 어깨에 국정현안은 물론 8월 임시국회, 정기국회를 이끌 짐도 얹혀 있는 것이다.

그가 2008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민주당의 수위라도 하겠다’며 복당했을 때, 이토록 빠른 성장을 예견한 이는 드물었다. 지난해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엔 “박지원의 수명도 다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당시까지도 그의 역할을 ‘DJ의 입’ 정도로 여기던 시각이 지배적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2009년 원내대표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킨 뒤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뛰어난 정보력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2010년 원내대표 선거에 당선, 제2의 정치적 전성기를 맞았다.

강점으로 꼽히는 근면성과 친화력에 대해선 경쟁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원내대표 선거가 한창이던 시절 매일 새벽 공항에 나가 입국하는 의원들을 영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업가 출신답게 협상과 거래에 능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자산이다.

세종시법 수정안과 집시법 개정안, 스폰서 특검법을 두고 대치하던 6월 국회에서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이뤄낸 막후 합의는 ‘여의도에 정치를 복원시켰다’는 찬사를 들었다.

최근에는 민주당 의원들의 회의 출석률이 부쩍 양호해졌다는 평가도 줄을 잇는다.

이 역시 박 대표 때문이라는 평가다. 박 대표의 지시를 받은 원내행정실 당직자들이 하루 세 차례씩 상임위를 돌며 의원들의 출석을 체크하고 있다.

회기가 끝나면 출석률이 공개되며, 또한 ‘당근책’도 있다고 한다. 박 원내대표는 성실한 의원들에게 배정하겠다며 ‘노른자 상임위’인 예결위 민주당 몫 11자리를 비워놓으며 의원들의 출석을 독려하고 있다.

한 초선 의원은 “강압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박 원내대표가 법사위, 운영위, 정보위 등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항의하기도 곤란하다”고 말했다.


풍파 속 다시 찾은 정계입문

정의화 국회부의장 역시 6월 임시국회 첫날 “끝까지 자리를 지킨 민주당 의원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야당 의원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한 바 있다. 이 역시 박 대표의 숨은 지략이 있었던 것. 때문에 앞으로도 박 대표의 리더십이 주목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19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박종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종식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목포상고 재학 시절 광주와 목포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진도중학교와 1960년 목포 문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단국대학교에 입학, 1969년 단국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했다.

그뒤 1999년 고려대학교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3기를 수료하였고, 2009년에는 목포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졸업 뒤 1970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다 미국에 건너가 1972년 11월 주식회사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에 임명됐다.

이후 사업을 하였다. 장기간 미국 체류 중 사업가로서 성공하고 1980년에는 뉴욕 한인회 회장을 지냈다. 이때 망명중인 김대중을 알게 되어 정치적으로 그를 따르게 되었다. 망명인사인 김대중을 극진히 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5월에는 미국 교포 자격으로, 수출유공자로 지정되어 국무총리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84년 김대중이 설립한 인권문제연구소 등의 후견인이 되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김대중이 사면복권되고 정계에 복귀하자, 미국영주권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14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당대변인을 거쳐 1996년 15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의 노동운동가 출신 김문수에게 석패해 금배지를 잃었으나, 1997년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에 선출되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 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1997년-1998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1998년-1999년) 문화관광부 장관(1999년-2000년) 등을 지냈다.

2002년에는 대통령비서실 실장에 취임하였고, 2003년 사퇴하였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사건 의혹이 제기되면서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직전 불법대북송금사건을 맡은 송두환 특검팀에 의해 2003년 6월에 구속되었다. 하지만 2004년 11월 대법원에서 당시 주요 혐의로 거론되었던 ‘현대비자금 150억 원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함에 따라 2006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대북 불법송금과 대기업 자금 1억 원 수수에 대한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2007년 2월 9일 특별사면조치로 형집행이 면제되었다. 석방 이 후 2007년 12월 복권되었다.

18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탈락했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12년 만에 원내에 복귀하게 됐고, 수장 반열에 올라 새 평을 열 준비를 하게 됐다.


‘박지원식 정치’ 청사진 기대감 커

한편, 그동안 전당대회 문제와는 한발 떨어져 있던 그가 전면에 나서면서 지도체제 등 그동안 지지부진 했던 전대 룰 문제가 조기에 매듭지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그는 원내대표 취임 일성으로 현 단일성 지도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로의 전환을 주장한 바 있다. 때문에 DJ의 날개에서 벗어난 그의 행보를 두고 정가는 ‘지략’과 ‘영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박지원 정치’의 앞날에 대한 궁금증을 표출한다. 박 대표가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란 꼬리표를 떼고 ‘박지원식’ 정치를 이뤄낼 지도 관심이 모아진다.

[이범희 기자] skycros@dailypot.co.kr

#박지원 프로필

▶ 문태고등학교
▶ 단국대학교 경영학과 학사
▶ 고려대학교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수료
▶ 2009년 목포대학교 명예법학박사

<경력>
▶ 2010년 5월 7일 민주당 원내대표
▶ 2008년 민주당 정책위의장
▶ 2008년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
▶ 2008년 국회 법사위원회 위원
▶ 2008년 제18대 전라남도 목포시 국회의원
▶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
▶ 2007년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 비서실장
▶ 2002년 ~ 2003년 제25대 대통령비서실 실장
▶ 2002년 장관급 대통령비서실 정책특보
▶ 2001년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 수석비서관
▶ 1999년 문화관광부 장관
▶ 1998년 ~ 1999년 청와대 공보수석
▶ 1998년 김대중대통령 당선자 대변인
- 중략 -
▶ 1980년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
▶ 1980년 뉴욕한인회 회장
▶ 1975년 데일리팻숀스 대표이사
▶ 19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장
▶ 1970년 럭키금성상사

<수상>
▶ 2009년 국정감사 우수의원
▶ 2005년 11월 진도군민의 상
▶ 2002년 6월 청조근정훈장
▶ 1983년 6월 국민훈장 동백장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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