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2인자’ 등극, 김경희 장성택 부부 최 측근에서 김정은 보좌한다

북한 당대표자회에 참석한 김정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27)이 지난 9월 28일 평양에서 열린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임명됐다. 이로써 김정은은 명실상부한 북한의 ‘2인자’로 부상했다. 당 중앙군사위는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당이 군부를 통제하는 기관이다. 김 위원장이 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다. 김정은과 함께 ‘대장’ 칭호를 받은 고모 김경희 당 경공업부장은 정치국 위원이 됐다. 고모부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은 중앙군사위 위원이 됐다. 부부가 나란히 당과 군의 핵심 요직을 맡아 김정은을 보좌하는 구조다. 북한의 새 권력지형 개편을 주도하게 될 인물들을 알아봤다.

김정은은 지난 9월 27일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으면서 북한 공식 매체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의 후계자 낙점설은 지난해 1월 처음 알려졌다. 당시 김 위원장은 김정은의 생일인 1월 8일에 맞춰 그를 후계자로 결정하고 이런 결정을 담은 교시를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하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김정은이 후계자로 낙점됐다고 알려진 뒤 당시 북한 내부에서는 ‘샛별장군’이 후계자가 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샛별장군은 무용수 출신의 생모 고영희가 살아 있을 때 김정은의 별칭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후계자 결정 이후부터 김정은은 ‘김 대장’ 또는 ‘청년대장’으로 불려왔다.

대북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시점은 이보다 훨씬 앞선 2006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북한군이 지난해 5, 6월경 배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외비 문건인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에 “2006년 12월 24일 김정은 대장 동지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증서가 기여된 자리에서 주체의 선군혁명위업을 빛나게 이으실 것을 바라시었다”고 언급됐다는 것.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을 마치고 2001년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는 2006년 12월까지 김일성군사종합대에서 군사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이 2000년대 초까지 후계자로 거론된 차남 김정철을 제칠 수 있었던 이유로는 형인 김정철보다 카리스마와 리더십에서 앞섰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 씨는 권력욕과 리더십이 남다른 김정은이 차기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정은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당 간부들을 무차별 해고하는 등 광폭적인 모습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자신처럼 영화를 좋아할 뿐 아니라 얼굴과 체형을 빼닮은 김정은을 편애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1996∼2001년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의 학력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는데 일부에서는 “북한은 김정은이 2002년 김일성종합대 물리학부 특설반에 입학했고 김일성군사종합대에도 입학해 2007년 졸업했으며 2004년부터 3년간 강원 평강군의 5군단 산하 보병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고 선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군 복무 경험은 후계 승계를 위한 선전일 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결정된 뒤 김 위원장의 거의 모든 공개적 활동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희, 김정일 앞도하는 ‘독한 카리스마’의 여동생

김정일의 유일한 피붙이로 알려진 김경희는 처음으로 대장 칭호를 부여 받았다. 김정일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김정은의 고모이며 장성택의 부인이다.

김경희는 1946년 5월 30일 김일성의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 김정일(어릴 적 러시아식 이름은 유라)과 슈라로 불린 둘째 오빠가 있었다. 하지만 슈라는 김경희가 태어나고 몇 달 뒤 연못에 빠져 숨지는 바람에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1949년에는 생모 김정숙이 출산 도중에 숨지는 일도 겪어야 했다. 이후 김성애가 의붓어머니로 들어오면서 김경희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경희의 외모나 성격은 생모 김정숙을 쏙 빼닮았다고 한다. 김정숙은 빨치산 시절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도 빨래한 김일성의 속옷을 몸속에 품어 체온으로 말리는 헌신으로 사랑을 쟁취한 ‘독한’ 여성으로 전해진다.

김경희는 김일성대 경제학부 재학 시절 당시 학부 사로청위원장이었던 장성택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아버지 김일성과 오빠 김정일은 둘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군부 출신의 사위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후 장성택은 원산경제대학으로 추방 당했다.

하지만 김경희는 주말마다 아버지 차를 직접 몰고 원산까지 내려가 장성택의 기숙사에서 빨래까지 해주었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런 김경희의 고집에 김일성과 김정일은 둘의 교제를 허락했다.

하지만 김경희는 장성택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해 1980년대부터 술에 의존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자식도 없어 입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 씨는 회고록에서 ‘김경희가 양주를 와인 들이켜듯 마셨고 술주정이 고약했으며 이럴 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또 남편 장성택을 매우 앙칼지게 대했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성택, 더 마셔” 하며 부하나 가정부를 대하듯 했다는 것이다. 이럴 때엔 장성택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경희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임명된 뒤 노동당 국제부 과장과 부부장을 지냈다. 1987년에 노동당 경공업부장으로 임명된 이후 지금까지 수행하고 있다. 경공업부장은 권력의 핵심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자리다.

하지만 김경희는 직책과 상관없이 오빠를 위해 배후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특히 김경희는 김정일이 성혜림-김영숙-고영희-김옥 순으로 여인들을 바꾸어가는 동안 모든 뒤처리를 해왔다고 한다.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김정남이 태어나자 이 소식이 아버지 김일성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막아준 것도 김경희으며, 김정일이 고영희에게 빠지자 성혜림을 모스크바에 보낸 사람도 김경희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의 여인들은 김경희를 무서워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일의 자식들도 고모인 김경희의 큰 관심 속에서 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 장성택의 형과 동생, 누나의 자녀들 혼사도 직접 챙겨왔다고 한다.

이 처럼 집안관리를 직접 해온 김경희는 이제 절대적인 권력 지형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조용한 후원자에서 벗어나 조카 김정은이 무난히 권력을 넘겨받을 수 있게 적극적인 후견인으로 전면에 나선 것이다.


김정일 매제이자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은 누구?

장성택은 1946년 강원도 천내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일성대에 입학해 김경희와 한 반이 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장성택과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에 까지 골인, 일약 ‘부마’ 자리에 등극했다. 이후 장성택은 김정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외교담당 과장 시절인 1970년대 중반엔 김정일에게 원기회복관이라는 명목으로 호화 관저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김정일에게 자금을 대기 위해 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 외교관들이 마약을 밀매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장성택은 음주가무를 즐겼다. 그는 1978년 여성들을 동석시키며 파티를 즐기다 김정일을 분노를 사면서 2년 동안 강선제강소에서 노역하기도 했다.

이후 1989년 노동당 청년사업부장으로 재기해 1995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됐으며 김정일의 매제라는 후광을 업을수 있었다. 1980년대부터 ‘장 부장’으로 불리며 직책에 관계없이 권력 2인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2004년 또다시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김정일은 장성택이 주요 국가직책에 자기 사람을 배치하는 것에 경계심을 느끼면서 ‘분파행위’와 ‘호화방탕행위’ 명목으로 그를 좌천시켰다. 장성택의 사람도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지방으로 실각됐다.

이후 장성택은 2006년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복권했고, 이때부터 살아남기 위해선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김정은 후계구축 과정에서도 김정일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몸을 최대한 낮추어 ‘충성 행보’를 보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전성무 기자] lennon@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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