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희 겸임교수

영화 “기생충”의 인기가 특급 태풍으로 지구를 휩쓸었다.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을 포함해서 4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영어가 아닌 외국어영화 부분에서 유사 이래 초유의 기록이라 한다. 한류문화의 또 다른 성공 상품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기생충’은 빈부 격차라는 불평등한 삶에 대한 묘사와 가난한 가족이 부유한 삶을 무작정 지향하면서 비정상적 몸부림을 통해 사회 병폐를 고발하는 영화라고 한다. 영화는 불행히도 두 주체(빈부)가 삶을 공유하는 포용을 찾지 못하고 공멸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기생충은 스스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기생충은 숙주에 기대어 살아간다. 영양분을 만들지 못 하니 숙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기생충은 숙주를 살려두어야 한다. 영화에서도 기생충 가족은 부자에 기대어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분별없는 욕심이 그나마의 삶도 그르쳤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기생충과 목숨을 건 자리다툼도 한다. 기생충은 오로지 자기의 삶밖에 관심이 없었고 타인의 삶과 생존을 위한 배려나 포용은 없었다.

에너지전환정책이 “기생충”과 닮아도 너무 닮은 듯하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앞세운 에너지전환정책이 국가를 부유하게 한 원자력에 기대어 탈원전이라는 이름으로 불쑥 무대 위로 등장했다. 원자력 중심의 무대가 불평등하다면서 주연 배우를 바꾸자고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무대의 막도 바뀌지 않았는데. 돌발 상황에 관객과 배우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공연 중 주연 배우 교체라는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영화 ‘기생충’처럼 잘 짜놓은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자신들만의 이념에 매몰된 에너지 비전문가와 원시에너지 환경을 절대선(善)으로 신봉하는 환경주의자들이 기획, 각색, 연출, 감독한 대한민국 ‘에너지 기생충’이라는 각본이다.

재생에너지가 원자력을 숙주 삼아 무대의 주역이 되는 각본이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정책이 영화 ‘기생충’처럼 기생충(재생에너지)과 숙주(원자력) 관계에서 기생충의 과욕으로 끝내 숙주를 죽이는 투쟁적 삶의 판박이가 될 것으로 보이는 것은 왜 그럴까? 영화의 끝을 보면서 필자는 탈원전을 숙주로 삼은 에너지전환정책의 결말을 보는 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재생에너지는 원자력이 책임져 온 기저발전 역할을 결코 할 수 없다. 자립형이 아닌 환경 의탁(依託)형이라 다소 불편해도 참을 수 있는 가정 및 건물용 보조에너지원 역할에 불과하다. 2019년에는 산업부문과 상업부문이 전력 수요의 78%를 차지했다. 독립성이 없고 불안정한 재생에너지가 대한민국 기저에너지가 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이유는 넘치고도 넘친다.

대한민국 에너지안보 보장, 4차 산업혁명 견인, 일자리 창출, 국부 증대, 전기요금 인상 억제, 온실가스 감축, 국토 환경 보전, 험악한 미세먼지 환경 극복, 지속가능성장과 국민행복 증대, 세계시장에서 기술경쟁력 향상 등등, 이 모든 것이 막대한 에너지 수요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과연 재생에너지 확대의 에너지전환정책이 이를 뒷받침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 왜 전력수요가 큰 반도체 산업계가 스스로 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할까? 전력 수급이 불안한 에너지전환정책이 잘못된 정책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항의하는 것이다.

숙주가 죽으면 숙주에 의탁한 기생충도 죽는다. 탈원전에 기대는 에너지전환정책이 숙주(원자력)가 죽어도 살아갈 수 있을까? 음침한 지하실로 숨어들어 갈까? 숙주가 있어야 기생충도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건 불평등이 아니다.

공존과 공생이 공정한 것이고 포용이고 정의로운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숙주와 기생충이 공멸하는 것을 보았다. 능력을 벗어난 분별없는 욕심은 공멸을 초래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친원전과 포용의 정책으로 돌아가서 모두가 생존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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