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 케레포프!’ 수원은 너무 놀라 숨을 헉 몰아쉬었다

술이 한 순배씩 돌자 곧 화제가 낮에 있었던 변사체로 옮겨갔다. 김승식 부장이 새로운 정보를 내놓을 태세로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물건 중 미심쩍은 게 있었는데, 그게 우리와 관련이 있더라고.”

“그래요?”
수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리에 있는 두 발전소의 인근 지도와 서생면 해류도를 가지고 있었거든.”
“서생면이라고요?”

영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생면은 신 고리 발전소 3, 4호기가 건설되고 있는 지역이었다. 한국형 대용량 원자력 발전소의 최초(빼시오) 건설지이기도 했다.

“가만있어 봐. 내가 그걸 해경에서 복사해 가지고 왔는데...”
김승식 부장이 옷걸이에 걸어둔 양복 안쪽에서 A4 용지 몇 장을 꺼냈다.
“서생면 지도 맞지? 이건 근방 해류도고...”
김승식 부장이 복사본을 영준에게 건넸다. 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류도는 수산 관계 기관에서 어업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수심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뒷면이 더 흥미로워. 무슨 소리인지 모를 단어가 잔뜩 적혀 있거든.”
김승식 부장이 복사본을 뒤집어 펴보였다. 낙서 같은 글씨와 사람 얼굴 같기도 한 그림이 있었다. 워낙 희미해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는지 닳아 없어진 부분도 있었다.
“저도 한번 볼게요.”

수원이 종이를 받아들었다. 수원은 어릴 적부터 암호풀이와 숨은그림찾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복사본 뒷면의 그림과 글자는 생소해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글씨 중에서 알파벳으로 된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나톨리? 아나토미?”

알파벳 한 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종이의 접힌 부분이었는지 닳은 자국이 복사본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Anatoㅣy.

글자 대신 세로 선 같은 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떻게 보면 l자 같고 달리 보면 m자 같았다. L자라면 ‘아나톨리’이고, M자라면 ‘아나토미’였다.
“무슨 뜻일까요?”
수원이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모두 고개만 갸웃했다.

“아나톨리는 잘 모르겠고, 아나토미는 해부, 분석이란 뜻이잖아.”
김승식 부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수원은 핸드폰으로 영어 사전을 불러내 Anatoly를 찾아보았다. 그런 단어는 없었다. 다시 Anatomy를 찾아보았다. 역시 ‘해부학, 해부, 분석’ 말고는 별다른 뜻이 없었다. 

‘아나톨리, 아나톨리라...’
영어 사전에는 없지만 어쩐지 귀에 익은 단어였다.
“꼭 러시아 작가 이름 같네.”
조민석 과장이 불쑥 말을 던졌다. 그러자 어떤 단어가 수원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나톨리 케레포프!’
수원은 너무 놀라 숨을 헉 몰아쉬었다. 
아나톨리 케레포프는 소련 공군의 최신예기 수호이(SU) 15 전투기 조종사. 1978년 4월20일 파리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707 여객기 902편에 미사일을 쏘아 무르만스크 아만드리 호수에 강제 착륙시켰다. 이 사건으로 비행기의 일부가 파손되고 사상자가 여러 명 나왔다. 그는 여러 매스컴과 정보기관에 사건에 대해 증언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아나톨리 케페포프는 승객과 승무원 109명(일부 보도는 110명)을 태운 대한항공 902편이 자국 영토를 침범했기 때문에 미사일을 쏘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증언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고, 진실은 현재까지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수많은 단체와 매스컴이 사건의 진상을 캐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프랑스, 러시아, 미국, 일본, 한국 등에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은밀히 정보 교환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이 사건이 핵 물질 운반과 관계있었다는 설이 대두됐다.

수원은 일찍부터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진상 파악에 나섰다. 파리 제6대학에 입학한 것도 저명한 핵물리학 교수가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이유는 아버지 죽음의 미스터리를 캐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최종 근무지가 파리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파리 발 서울행 대한항공 902편 강제착륙 사건에 뭔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수원이 태어나기 3년 전에 돌아가셨다.

2.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자는 망한다

수원은 밤늦게 해운대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서는 아나톨리인지 아나토미인지 하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방에 들어서니 컴퓨터 책상 위의 전화기 불빛이 반짝거렸다. 메시지가 두 개 녹음돼 있었다. 첫 번째는 미국에 있는 어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전혀 뜻밖이었다.

“수원아, 나 배성민이야. 한국에 있다는 말 듣고 연락했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수원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수원은 메시지가 끝날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다시듣기 버튼을 눌렀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밤의 공기를 휘감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성민과 이별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하지 말자.’

수원은 고개를 가로로 세차게 저었다. 
수원은 성민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웹스터 영어 사전을 꺼냈다. 하도 오랫동안 가지고 다녀 표지가 너덜너덜했다. 중학교 입학식 날 어머니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수원은 사전을 열어 Anatoly를 다시 찾아보았다. 역시 표제어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라는 뜻이었다.
‘역시 아나톨리 케레포프란 말인가?’

수원은 문득 고유미가 생각났다. 파리에 유학하면서 만난 친구였다. 파리대학의  서클 중에 무르만스크 대한항공 여객기 902편 강제 착륙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모임이 있었다. 거기서 만난 회원이었다.
외국어, 특히 일본어에 유창한 고유미는 파리 제2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 시절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였지만 지금은 소식이 끊긴 상태였다. [계속]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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