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그해(공민왕15) 4월 중순.  

어느 날 하루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승석(僧夕) 무렵.

명덕태후는 혜비전을 방문했다. 반갑게 맞이하는 혜비를 보자마자 명덕태후는 며느리의 손을 잡으며 서러움에 복받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혜비도 가늠할 수 없는 한숨만을 쏟아놓고 있었다.

두 여인은 이제현의 수난과 최영·이존오가 귀양 가게 된 것을 함께 가슴아파하며 공민왕의 변덕과 광포함을 막을 방도가 없음을 한탄했다.

“대비마마…….”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먼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혜비가 알고 나 또한 알고 있는 일이 아닙니까…….”

“주상께서 마음을 돌려 예전으로 돌아가셔야 하는데……, 걱정이옵니다.”

“다들 믿지 않아도 나만은 믿고 있어요. 종사의 앞날이 아직은 익재 대감의 높은 경륜과 최영 장군의 두 어깨에 달려 있음을…….”

송악산 계곡마다 짙은 신록이 물결치는 4월 말경이었다.

최영 장군과 아끼던 이존오·정추마저 귀양간 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제현은 문득 제자 이색이 그리워졌다.

“만복이 있거든 가까이 들렷다!”

“찾아계시옵니까, 시중 어르신.”

“지금 곧 목은 댁으로 달려가서 서둘러 내가 다녀가라 이르렷다!”

“알겠사옵니다.”

얼마 후, 스승의 부름을 받은 이색은 자신의 애제자인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수철동 이제현의 집에 당도했다.

이때 정몽주는 30세로, 정도전·이숭인과 함께 이색의 문생으로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예조정랑으로 성균관 박사를 겸하고 있었다. 그는 뒷날 이제현의 학문을 집대성해서 성리학을 체계화하여 동방 이학(理學)의 종조가 되며, ‘단심가(丹心歌)’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화를 보여준 만고의 충신이 된다.

근래 홍건적이 강을 건너 침략했는데,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어떤 책(策)과 술수(術數)가 의(義)에 합치하겠는가.

이것은 공민왕 9년(1360)에 치러진 문과의 시제(試題)로, 24세의 청년 정몽주는 과거에 응시해 다음과 같은 대책문(對策文, 답안지)을 써내려가 장원 급제했다.

문무(文武)를 함께 써야 하는 것은 왕이 따라야 할 대법(大法)이며 만대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근래에 이런 것들이 무너져 홍건적이 생겼다. 문무를 겸한 인재를 중용해야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 강태공, 사마양저(제나라 병법가), 제갈량 같은 사람들이 문무를 겸해 인의(仁義)로 적을 물리쳤다. 이런 것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제현은 이색과 정몽주의 인사를 받은 후, 정몽주의 손을 가만히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색이 아끼는 애제자인 정리(情理) 때문인지 정몽주를 친손자처럼 다정하게 대하며 말했다.

“우리 고려는 지난 97년간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상제(喪祭)가 문란해져 사대부들마저도 100일이 지나면 탈상하기에 이르렀네. 하지만 포은(圃隱, 정몽주의 호)은 시묘(侍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해서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이를 표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정몽주는 몸을 가지런히 바르게 세우며 대답했다.

“시중 어르신, 자식 된 도리를 한 것뿐이옵니다.”

이제현은 다시금 화제를 정치로 돌려서 말했다.

“목은, 요즈음 시중의 풍설(風說)은 어떠하던가?”

“금상께서 신돈을 왕사로 등용하고 최영 장군, 이존오, 정추를 비롯한 조정의 공신들을 모두 귀양 보낸 처사에 대해 세간에 풍문이 난분분(亂紛紛)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한창 가뭄 때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재력을 고갈시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옵니다.”

“그럴 테지.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할 것이 아니라 영전공사에 들어갈 막대한 재원을 아껴 국방력 강화에 쏟아 부어야 하는데…… 머지않아 저 요동 땅은 무주공산이 되고 말걸세. 원이 몰락하고 한족이 다시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힘의 공백상태가 생기게 될 거야. 우리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하여 잃어버린 옛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아야 하는데…….”

“스승님, 지금 고려에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은 최영 장군밖에 없는데 최영 장군이 귀양 가 계시니 정말 통탄스럽사옵니다.”

“금상은 신돈이란 요승을 만나기 전까지는 영매한 분이었네. 오직 자주독립과 실지회복을 평생의 꿈으로 간직했던 분 아니던가. 게다가 선견지명(先見之明)도 갖추고 계셨고……. 그러나 오늘의 금상은 과거의 금상이 아니시네. 노국공주가 죽고 나서는 완전히 바뀌었어.”

“예, 신돈은 20년 전 충목왕 때부터 고려의 정치개혁을 위해 앞장서 오신 스승님을 ‘나라의 도적’이라고까지 공공연히 욕되게 하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부화뇌동한 금상의 눈에는 스승님과 저희 문생들이 강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도당(徒黨)으로 비쳐지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사옵니다.”

제자의 피 끓는 하소연에 마음이 흔들려서일까. 이제현은 성리학자로서의 회한을 담담하게 피력했다.

“성리학은 금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것이네.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이 우리 고려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배경도 이와 같네. 오랜 무신정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골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의 특성을 지닌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 어른의 이상이셨네. 그 후 안향 선생의 제자인 권부, 백이정, 우탁 선생 등이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전파함은 물론 과거시험에 채택함으로써 성리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게 되었네. 나는 스승님들께서 이뤄놓으신 학문적 바탕 위에 정치적·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이네.”

스승의 회한 어린 말씀에 가슴이 짠해진 이색이 말을 이었다.

“지난 세월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 정신에 입각하여 개혁정책을 제안하였사옵니다. 사원의 폐해와 승려들의 비행에 근거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의 정명적(正名的) 명분의식에 기초하여 제도개혁을 주장하고, 정방의 폐지, 토지제도의 개혁 등 실로 많은 성과를 이루었사옵니다.”

“목은, 이제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80평생 충절의 일생이 요승의 말 한마디에 의해 폄훼되고 있는 세상이네. 남아있는 후학들이 걱정이네. 자네의 역할이 그만큼 무거워 졌음이야…….”

힘없이 말하는 스승의 당부에 이색은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 스승님.”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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