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육영수 여사 [뉴시스]
육영수 여사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문세광 흉탄에 故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다”
“우리가 일본에 공세를 하니까 일본이 수세에 몰렸다”

- 1974년 10월,  다시 또 한·일 관계 업무로 복귀를 하신 걸로 봐야 될 것 같다. 1974년이면 한·일 관계가 시끄러웠을 무렵인데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도 있었다.

▲ 김대중 사건 때는 우리가 몰렸고, 이후 일본 여권을 가진 문세광이 대통령을 저격해 그 흉탄에 영부인이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일본에 공세를 하니까 일본이 수세의 입장에 몰렸다. 이렇게 양국관계가 대단히 어려워지니까 양국 외무당국 간에 관계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무대가 마련이 된다. 일본 측은 미야자와 기이치 외상의 방한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우리도 물론 그걸 원했다. 그래서 미야자와 방한이 1975년 7월 22~23일 이루어진다. 그때 아주국 심의관으로서 외상회담에 참석은 했다. 그런데 실질적인 문서 업무는 오재희 당시 아주국장이 실무책임자를 했고, 김정태 차관보가 큰 역할을 했다.
이때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여했다고 해서 일본 경찰이 김동운 서기관의 참고인 소환을 요구했다. 김동은 서기관은 사건이 난 후에 한국에 바로 돌아와서 일본 측의 참고인 소환에 불응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결국 한국 측이 조사해 본 결과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한국 공무원으로서의 품위를 심히 손상했기 때문에 면직시켰다고 하는 두 가지 내용을 담은 구상서를 외상회담에서 일본 측에 전달한다. 그 후 일본에서는 미야자와 외상이 이것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단락 지었다고 언론에 발표를 했다. 한·일 외상회담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당시 김동조 장관이 결국 미야자와 외상과의 사이에서 이런 수순을 밟아서 두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그런데 그 후 리마 비동맹외상회의에서 우리의 비동맹 가입 실패가 한 요인이 돼 김동조 장관이 물러나게 된다. 이건 물론 국제관계 하던 친구들, 이시영 대사도 녹취를 했다고 들었는데, 이시영 대사가 그때 UN과장으로 실무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있었기 때문에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거다. 이때 노신영 차관이 외무부 심의관, 국장 이상 간부들을 외무부장관 공관에 불러서 “리마 비동맹외상회의에 지금 북한이 가입을 하려고 하는데 이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방법이 뭐가 있었느냐”하는 문제로 난상토론을 했다. 그때 다수 의견은 “북한이 중공·소련과 동맹관계에 있고, 비동맹에 들어가겠다고 하고, 비동맹이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분위기다. 우리 한·미 동맹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도 비동맹에 가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차라리 비동맹 속에 들어가서 맞서는 게 효과적이겠다”는 소위 적극적인 저지론이 대세였다.
지금 다시 그런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역시 “정공법으로 나갈 도리밖에 없는 거 아니냐. 가봐야 안 될 텐데 하고 미리 물러서는 게 반드시 옳은 방법은 아니겠다”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신청해서 우리를 지지해주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사우디아라비아, 심지어 인도 같은 마일드한 동맹국들에게 많은 동정을 받고, 또 측면 지원도 받고 했으나 베트남 외상 응웬티 빈이 눈물을 흘리면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 때문에 많은 베트남인이 죽었다는 언급을 하니까, 온 회장이 숙연해져서 말도 못 붙였다.

- 당시 중공과 수교하고 북한을 인정하는 국가가 늘어나고, 또 북한이 비동맹회의에 참가하는 등의 자료를 보면 역시 데탕트 이후에 한국 외교가 국제사회에서 수세에 처하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전만 하더라도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미국과 UN의 지지를 얻고 우위에 섰다가, 1970년에 들어 점점 어려워졌고, 이 비동맹회의가 그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었나.

▲ 소위 제3세계가 UN에 가입하기 시작하는 건 1960년대 후반부터다. 50개국 정도로 출발한 UN이 이때는 공산권 12개국 외에는 전부 친서방적이었다. 그러다가 1969년에는 한꺼번에 아프리카 20개 신생국들이 UN에 가입을 하면서 판도가 달라진 거다. 그러니까 특히 비동맹이 조직된 힘을 발휘하게 되고, 우리가 UN에서 한국 문제를 다루는 데 굉장히 부담스러워졌다. 비동맹의 힘을 북한이 업고 있으니, 우리가 더 어려운 처지가 된 거다. 그래서 그 적극적인 대응방책의 하나로서, 결국 우리도 비동맹에 가입하자는 것이었다. 결정 자체는 그렇게 나빴다고 볼 수는 없다. 결론은 안 되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생각은 했다. 어려운 싸움이지만 한번 해보기로 했던 거다.

- 또 이 시기에 사이공이 공산화되면서 우리 공관원들이 억류되는 사건이 있었다. 최근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됐는데, 일부에서는 당시 우리 정부의 대응이 철저한 언론통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비판이 있다. 당시 상황은 어땠나.

▲ 그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진행됐다는 비판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외교 교섭에는 공개할 수 있는 게 있고, 공개할 수 없는 게 있다. 공개하면 회담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비밀 여부보다는 그 내용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이때 이 문제는 제가 심의관일 때 시작됐고, 아주국장 때 와서도 계속 관련된다. 베트남전은 아시다시피 파리에서 월맹과 미국 간에 키신저 박사가 개입을 해서 타결돼, 결국 1971년 1월 28일에 닉슨 대통령이 협정 체결을 함과 동시에 베트남전 종전 선언을 한다. 그래서 미국이 두 달 후에는 철수하고, 베트남군만 남은 거다. 그래서 베트남군이 혼자서 싸우는데, 1975년 4월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베트남에 대한 경제·군사원조를 위해서 미국 상원에 7억2200만 달러의 원조를 요청했는데, 부결이 됐다. 물론 한국군도 다 철수한 때였다. 그러니까 이 사태를 보면서 “베트남에 혼자서 싸우라 하고 돈도 안 대주면 베트남은 어떻게 되는 거냐. 곧 지는 전쟁이 아니냐”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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