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제현은 옆에서 다소곳이 듣고 있는 정몽주를 향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의 부족한 학문은 목은을 통해 더 발전하고, 포은이 꽃피울 수 있을 거야. 목은도 자네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하지 않았는가?”

“받자옵기 민망한 말씀이시옵니다. 어르신…….”

이제현은 비감한 어조로 두 제자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내 마지막으로 자네들에게 당부하네. 우리 성리학자들은 ‘유약하여 강직하지 못하고 당을 만들어 사정(私情)에 따른다’는 오명을 씻어내야 하네. 그리고 고려의 국운을 개척해나가는 선각자들로 거듭나야 할 것이야.”

“스승님, 저와 포은은 요승 신돈의 패권이 올바로 행사되도록 견제하고 민족주의와 춘추대의에 충실한 성리학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겠사옵니다.”

“고맙네 그려. 다행히 이존오의 목숨을 구했으니, 나는 이제 하루라도 빨리 동주(東州, 철원)의 지장사로 다시 들어가 아예 나오지 않을 생각이네.”

“조정에 큰 일이 생기면 기별 올리겠사옵니다.”

“그럼 자네들만 믿네.”

1366년(공민왕15) 5월 말.

신돈은 목숨을 건 이존오의 상소사건이 마무리 되자 개혁의 칼을 빼어든다. 이때 이제현은 철원의 지장사에 들어간 후였다. 신돈은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백성들에게 도감 설치의 뜻을 공포했다.

근래 기강이 문란하여 탐풍(貪風)이 성행하고 있도다. 종묘, 학교, 창고, 사원, 녹전, 공수전(公須田)과 세업전(世業田)을 강호(强豪)들이 마음대로 차지하여 자기의 소유로 만들고 있도다. 이제 도감을 두어 그것들을 전 소유자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노라. 개경과 그 주변은 15일, 기타 지방은 40일의 기간을 준다. 제 날짜에 돌려주는 자는 그전 잘못을 묻지 않겠노라! 만약 기한이 지나도 반환하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노라!

이 명령이 발표되자, 노비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성인이 세상에 출현했다’고 칭송하였고, 반면에 노비와 토지를 잃은 양반들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공민왕은 신돈을 나라와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한 신하로 그의 공과 덕을 찬양했다.

불초한 과인이 나라에 임한 지 15년 동안 홍수와 가뭄의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금년에 풍작이 들었으니, 이는 실로 신돈의 선치(善治)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 때는 단짝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의 갈 길로 떠나버려, 그 때문에 많은 기회가 스러진 만남을 ‘구름과 구름의 만남(雲雲之會 운운지회)’이라 한다. 공민왕과 신돈의 만남이 그러했다.

신돈은 집권기간 6년 동안 권문세가의 유력자들을 거세하면서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개혁적인 시책을 전개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1367년부터는 처첩을 거느리며 아이를 낳고 주색에 빠져 비난이 높아진다.

신돈이 이존오가 별세한 후 석 달 만인 1371년 7월에 반역으로 처형당하자 공민왕은 이렇게 말한다.

‘익재의 선견지명에는 아무도 미칠 수 없다. 일찍이 신돈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지금 과연 증험되었다.’

해동의 명재상, 민족자존의 혼으로 영생하다

나라 밖은 원나라의 쇠망 기조가 뚜렷했다.

항원(抗元)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진우량은 파양호(陽湖) 해전에서 전사했고, 반원세력의 주도자인 주원장은 1364년 스스로 무왕(武王)임을 선포했다. 원나라가 중원에서 일어난 주원장에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원나라 순제는 나라가 존망지추(存亡之秋)에 달려있는 데도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여전히 유흥에 빠져 있었다. 기황후의 아들인 태자는 권력이 점점 불교승려와 환관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우려하여 순제를 퇴위시키려는 계획을 몰래 꾸몄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나라 안은 말세의 조짐이 완연했다.

어지러운 세상에는 입과 혀로 천하를 다스리려는 풍조가 나타난다(末世以口舌治天下 말세이구설치천하). 공민왕이 친정(親政)을 포기하자 신돈의 말은 곧 법이요 길이요 진리가 되었다. 신돈의 말 한마디에 죽을 사람이 살아나고 살 사람이 죽어나갔다. 고려 천지는 신돈의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중국 후한 말기 환관, 외척, 선비들이 같은 파의 사람을 편들고 다른 파의 사람을 무조건 배격했던 말세적 행태를 《후한서》의 <당동전>은 ‘당동벌이(黨同伐異)’로 함축했다. 고려의 신료들이 힘들어하는 건 힘없는 나라의 관리로서의 비애보다 요승 한 사람에 의해 줄서기를 강요당하는 ‘당동벌이’의 세태와 흡사했다.  

정계를 은퇴했다고 하지만 80평생 온갖 풍상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제현이었다. 그런 이제현의 명성은 신돈의 집요한 참언(讒言)과 공민왕의 정신적 타락에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황폐화된 조정과 일진광풍(一陣狂風)이 휘몰아치고 있는 개경은 이제현에게 점점 낯선 곳이 되어갔다. 그는 어느덧 이 을씨년스런 큰 도읍의 복판에 철저히 혼자 버려진 이방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47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후삼국 시절(901년) 궁예(弓裔)가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당시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이렇게 예언했다.

궁전을 짓되 금학산을 진산(鎭山)으로 정하면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앞으로 나라를 300년 동안 통치할 것이요, 만일 금학산이 아닌 다른 산으로 정하면 국운이 30년밖에 못 갈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도선국사의 예언을 무시하고 고암산(철원평야 북쪽)을 진산으로 정하고 궁전을 지었다. 그 후 금학산의 수목들은 죽지 않았음에도 3년 동안 나무에 잎이 나지 않았고, 곰치는 써서 못 먹었다는 ‘궁예의 전설’이 전한다.

지장사가 위치한 고암산은 봄에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을 이루고, 여름에는 녹수청산(綠水靑山)을 이루다가, 가을에는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단장하고, 겨울에는 망망운해(茫茫雲海)를 이루는 명산이다. 지장사는 이제현에게 마음의 고향이었다. 지장사 경내에 있는 궁예가 심었다는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 그리고 늙은 소나무는 이제현에게 정다운 벗이었다. 고사리, 곰치, 더덕 등 산나물의 체취를 느끼는 산사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고립된 듯한 외로움으로 허허로웠으나, 곧 그 외로움은 이제현을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이 되어, 그와 자연을 혼연일체 하나가 되게 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