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은 군소정당의 사표(死票) 방지와 다당제 확립을 명분으로 제1야당의 반대를 억누르고 선거법을 강행처리했다. 여당이 시민에게 약속한 개혁과 쇄신은 오간 데 없고,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는 이미 사라졌다.

국회의원 비례대표 제도는 총선 후 폐지를 검토해야 할 정도로 한계상황에 봉착했다. 비례대표는 각 직능을 대표하는 전문가를 발탁하여 지역 대표성을 보완하는 제도다. 소속 당의 정치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소속 당의 정체성에 합당한 인물들을 뽑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판에선 비례대표가 그 본연의 취지는 사라지고 한 석이라도 더 얻기 위한 당리당략과 붕당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한 상태다.

비례정당을 둘러싼 꼼수와 편법이 21대 총선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8일 친문(文) 그룹이 주축이 된 ‘시민을 위하여’와 비례대표용 연합정당을 구성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기본소득당, 시대전환, 가자환경당, 가자평화인권당 등과 비례연합정당(더불어시민당)을 만들기로 협약했다. 모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무늬뿐인 정당들이다.

민주당은 미래통합당의 비례정당 창당을 비난해오다 선거가 불리해지자 문재인 대통령의 탄핵을 막기 위해 소수정당을 의석 확보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앞으로 민주당은 비례연합정당 기호를 앞 순위로 당기기 위한 ‘의원 꿔주기’도 결행할 것으로 보인다.

조국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최강욱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비례대표 사퇴 시한인 지난 16일 사표를 냈다. 최 전 비서관은 변호사 시절 조국 전 법무장관의 아들에게 인턴확인서를 허위 발급해 준 혐의로 기소된 인물이다. 최 전 비서관은 민주당 주도 비례정당의 비례대표 출마설로 뒷말이 무성하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재판 중인 여당 인사들의 무더기 총선 출마를 목도한 국민은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이 여당 간판을 달고 4·15 총선에 출마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헌정사에 일찍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이는 검찰 수사를 조롱하고 유권자를 우롱하는 일이며, 공권력을 무력화하고 법치를 짓밟는 시도로 비칠 수 있다.

법원의 최종 판결 전까진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현행법상 이들의 총선 출마를 막을 규정은 없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선거부정 사건이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으며, 법의 심판대에 서 있는 사람이 유권자의 심판을 받겠다는 것은 특권의식의 발로다. 때문에 민주당은 재판 중인 후보자들의 공천을 지금이라도 철회해야 한다.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비례대표 명단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문제는 비례대표 명단에서 통합당이 수개월간 공들여 영입한 인재들이 거의 다 당선권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통합당에서 영입 기자회견까지 마련해 비례대표 후보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해놓고선 이제 와서 전혀 다른 사람들을 내세우는 건 유권자를 기만하는 행위다. 통합당과 한국당은 자매정당이고, 통합당이 큰집이라면 한국당은 작은집이다.

통합당과 한국당을 지지하는 보수 성향 유권자 입장에서는 비례 후보자 면면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통합당은 지역구 공천 물갈이에는 성공했으나 일부 당 정체성에 맞지 않은 후보 선정으로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처럼 통합당이 지역구 공천에서 ‘절반의 성공’ 밖에 거두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한국당은 비례대표 선거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그물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생각하자)’이라는 고사가 있다. 공병호 미래한국당 공관위원장은 한국당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공 위원장은 공천은 당 대표의 책임 아래 이뤄지는 것이며, 공관위원장은 다만 다수의 공관위원과 함께 공천업무와 관련된 직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4년 전 김무성 전 대표의 소위 ‘옥새 파동’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고, 한선교 미래한국당 대표와 공병호 공관위원장은 순리를 따라야 한다. 세 사람이 막후 조율을 통해 공천사태를 수습해서 보수 정치의 자멸을 막아야 한다. 만약 보수 정치세력이 4.15 총선에서 패배한다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사망선고를 당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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