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모습 [뉴시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모습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베트남 감옥에 갇힌 대한민국 공관원↔북한 간첩 맞교환 협상”
“북한은 필요성이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간적인 고려도 안 한다”

▲ 그런데 이때 월남 응웬 반 티우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서 긴급원조를 요구했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긴급원조를 하기로 하고, 그 긴급원조 물자를 싣고 우리 해군 배, LST 세 척을 보냈다. 그런데 이 배들이 다낭에 도착할 때는 벌써 사태가 악화돼서 하역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배가 다시 사이공으로 갔다. 본부에 앉아서 베트남 지원이 부결되는 사태를 보니 철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 시점이었다. 그런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4월에 지원이 완전 끊어지니까 아주 긴급해졌다. 그래서 국방부와 월남 문제를 협의했다. 그때 정무차관보가 김정태 차관보, 아주국장이 오재희 국장이었는데 동남아로 출장을 갔다. 자기 고등학교 동창이 정소영 농수산부장관인데 이분이 출장가면서 외무부 아주국장을 꼭 데려가겠다고 해서 동창끼리 둘이서 출장을 간 거다.

- 1975년 사태 때 말씀이신가.

▲ 그렇다. 사이공 패망 그 직전이다. 그래서 당시 이희성 국방부 기획국장과 함께, 합참에 있는 분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두 분이 왔다. 그때 김정태 차관보는 정세가 굉장히 어둡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만 해도 한 40~50만 명 베트남군이 건재한 상황이었다. 베트남군이 40~50만 명 있는데 쉽게 무너지겠느냐고 물었더니, 이희성 장군이 베트남을 벽돌집에 비유하면서 “벽돌집은 평지에 딱 있을 때는 굉장히 단단한데, 조금이라도 기울면 와르르 무너진다. 그렇게 와해되는 거다”라 했다. 그 비유를 들으니까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래서 빨리 철수 준비를 하라고 현지에 요청했다. 실제로 이때 전보를 찾아보면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베트남대사관은 상황을 굉장히 낙관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니다. 지금 우리가 밖에서 듣는 상황은 굉장히 급하다”고 여러 이야기를 해주고 다그쳐서 공관원들 철수도 시키고 최소 인원만 남기라고 했는데, 3~4명 정도를 생각했는데 12명가량 남았다. 꽤 많은 인원이 남은 거다. 그래서 다낭에도 원조물자를 풀 수 없으니까 배를 사이공으로 들여보내고, 그 배에 짐을 풀고 교민을 철수시키려고 결정을 했다. 그런데 사이공 항구에 도달하니까 항구까지 들어가는 그간의 치안이 굉장히 불투명했다. 그래서 함장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당시 김영관 대사가 해군참모총장 출신이라, 해군본부에 독촉도 하고, 여러 가지 조치를 해서 결국은 4월 22일 사이공항에 LST 두 척이 들어갔다. 그래서 사람들을 싣고 4월 26일 출항을 했다. 교민 319명, 베트남인 가족 등 베트남 사람들 1011명이 포함됐다. 그런데 배가 떠나려고 하니까, 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서 베트남에서 한바탕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교민 150명 정도가 배에서 뛰어내렸다. 이 사람들이 결국은 큰 짐이 됐다. 그때 철수계획에 따라 남은 우리 공관원들은 미국대사관에서 헬리콥터로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현지 교민철수 대책위원장 이대용 공사가 그 질서를 잡기 위해서 교민들에게 줄을 서라고 하고, 우리 공관원들이 제일 마지막으로 나가겠다고 한 거다.
미국 해병대가 한국 공관원에게 나오라고 해도 나가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는데 작전이 끝나버리게 됐다. 그러니까 남은 공관원들이 9명이지 않느냐. 그중에 이대용 공사가 있고, 서병호 총경이라고 치안국에서 나간 사람이 있었고, 안희완 서기관이라고 중앙정보부 파견관이 있었다고 마지막에 탈출한 사람들에게 들었다. 나머지 우리 공관원들 중에 김창근 2등서기관은 탈출을 했다. 아는 베트남 사람이 보트로 나오겠다고 하니까 돌아와서 보트로 가자고 그랬더니 이대용 공사가 너무나 위험이 많다고 해서, 그러면 각자 결정에 따라서 움직이자고 했다. 그래서 김창근 서기관이 보트를 타고 5월 8일에 나와서 싱가포르로 탈출을 했다.
남은 우리 공관원은 8명이었다. 월맹이 사이공을 점령한 후에 다소 질서가 회복되니까 외국 사람들 철수를 받았다. 결국 1976년 5월 9일에는 남은 공관원 중에 이규수 참사관을 위시해서 5명이 나왔다. 그런데 이대용 공사를 포함해서 정보당국 사람 3명이 베트남 감옥에 수감됐다. 이분들은 1980년 4월 12일 석방될 때까지 4년 남짓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때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며 온 외교경로를 통해서 석방운동을 했고, 특히 프랑스 정부의 협조를 받아서 수감된 공관원들과 연락을 취했다. 이때 연락을 취해준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영사의 부인이 한국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분들을 면회하고, 사람을 통해 연락을 해서 “정부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마음 굳건히 먹고 기다려라”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또 돈도 보내서 필요한 물품을 차입하도록 하는 등 대통령께서 굉장히 신경을 쓰셨다. 계속 외지근무 기준 봉급을 가족들에게 주도록 조치했다. 가족들의 생계도 중요하니까.
그러다가 프랑스 정부의 개입을 통해서 이 3명의 석방을 교섭하는 비밀협상이 시작됐다. 그래서 베트남 측에서 “북한이 동의를 하면 사람들을 내놓겠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서 사형수들을 맞교환하면 어떻겠느냐는 북한의 아이디어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우리가 수락하고 비밀교섭을 했다. 이 비밀교섭이 1년 계속됐다. 여기서 참 놀라운 사실이 있다. 우리는 맨 처음에 교환비율을 1대 1로 교섭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북한 쪽에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사형수 명단을 달라고 요구해서 명단을 줬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어째서 1대 1이 되어야 하느냐고 논쟁을 시작한 거다. 결국은 여러 고비를 넘기고 1대 7로 올라갔다. 그래서 남한에 있는 북한 간첩들 21명을 석방해주는 대가로 우리가 받는다는 데까지 합의가 됐다.
그리고 그러면 누구를 받아갈 건지, 소위 말하자면 남한의 모든 간첩들 명단을 달라는, 무슨 재고라도 조사하는 것처럼 요구했다. 그렇지만 대통령께서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줬다. 그런데 그 안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재일동포가 5명이나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남한 출신의 간첩혐의를 받은 사람들 달라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한 출신은 가족이 남한에 있는데 어떻게 보내느냐. 그건 안 된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보내준다”고 하니까 관심을 표시 안 했다. 그러니까 필요성이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간적인 고려도 안 하는 거다. 그렇게 북한의 의도가 분명해짐에 따라서 우리가 이 회담을 거절했다. 당시 이범석 대사가 그 회담의 수석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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