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뉴시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잠시나마 與-野 관계 좋던 시기”
“이때 이집트로 발령 받았는데 라마단 기간이더라”

▲ 그러고 나서 1년 후쯤, 한국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아이젠버그라는 이스라엘 계통의 호주 사람이 베트남전쟁 당시에도 베트남에 들어가서 상사를 차리고 비즈니스를 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베트남 당국과 이야기할 수 있는 채널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베트남 정부가 한국 외교관 세 사람을 석방할 용의가 있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레이프란드 스웨덴 외무차관이 윤하정 대사에게 건넨다. 그 이야기가 전달돼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이젠버그의 제의를 전하게 된다. 그래서 수락했다. 이렇게 아이젠버그와 스웨덴 정부, 두 채널이 맞닿아서 베트남에서 양쪽 이야기를 같이 수용을 했다. 그래서 레이프란드 스웨덴 외무차관이 자기 전용기를 내서 직접 가서 인수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외교관들과 함께 서울로 오는 거다. 아시다시피 스웨덴은 베트남전쟁 때 계속 베트남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경제원조 등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웨덴 정부에 대해서 베트남 정부가 항상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다.
또 하나는 윤하정 대사가 이 3자회담 초기에 수석대표가 된다. 이 회담이 논의되던 초창기에 회담을 어디서 할지, 누가 수석대표가 될지, 의제는 무엇으로 할지를 결정하는 예비회담을 해야 하지 않느냐. 그래서 그 예비회담을 위해서 제가 예비회담 수석대표로 뉴델리에 갔다. 뉴델리 베트남대사관에서 저와 베트남대표, 북한대표 셋이 만나서 회담을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재밌는 것은, 우리는 대사가 차관급 아니냐. 그래서 대사라고 했더니 북한 측에서는 “대사는 국장급이다”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사가 차관급이다. 총리 지내신 분도 대사가 됐는데 그분도 차관급의 봉급을 받게 된다”하는 이야기를 해도 안 듣는 거다. 그래서 “평양에 훈령해서 우리 대한민국 법령집이 있을 테니까 한번 보시라”고 했다. 그러고 옥신각신 몇 번 회의를 했다.
그래서 제일 첫 번째 회담대표인 당시 주스웨덴대사로 발령받은 윤하정 전 차관은 부임하는 길에 뉴델리에서 회의에 몇 번 참석을 했다가 이범석 대사에게 수석대표직을 넘기고 갔다. 북한 측 사람들이 대사는 국장급이라고 대사를 안 받겠다고 한 이유는 만약 대사급을 받으면 이범석 대사가 수석대표로 나올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한테는 불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범석 대사가 남북적십자회담 때 한국 측에서 남쪽 대표로 활약을 했다. 이범석 대사를 잘 아니까 아마 기피했던 듯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예비회담 북한 측 대표로 온 사람이 박영수씨로, 후에 남북회담에서 남한 불바다론을 말한 사람이다. 차관급 회담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김일성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남북조절위원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회담 이후에는 이 사람이 사이공에 나타난다. 우리 측에서는 이대용 공사가 박영수씨를 만났는데, 갖은 협박을 하면서 이대용 공사와 안희완 서기관, 서병호 총경 등을 북한에 데려가려고 두어 번 신문을 한다. 그러고 나서 평양으로 왔다. 이대용 공사가 나온 후에 쓴 회고록에 나온 내용이다.

- 베트남이 한국 외교관 3명을 석방하기로 결정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베트남이 1년간 회의를 해보니까, 베트남의 규범으로 봐도 국제적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한 거다. 베트남만 하더라도 국제적인 규정을 따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모든 게 그렇다는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그래도 커다란 줄기는 그랬다. 그런 걸 지금 고맙게 생각한다. 또 베트남 측에서는 처음부터 절대 이북에는 한국 외교관을 보내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 인권 문제나 전쟁 포로에 관한 규약 등을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국제적인 규범을 의식하고 실천한 건가.

▲ 그렇다. 의식하고 한 거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 이후에 장관님께서 1979년 6월 카이로총영사로 부임을 하셨다.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 격동하는 외교현장을 멀리 중동에서 지켜보고 계셨는데, 당시 이집트와 북한의 관계, 그리고 이집트와 한국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해 달라.

▲ 저는 후쿠다 전 총리가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곧이어 카터 대통령의 방한 행사에 참여하고 나서 7월경에 카이로에 부임을 했다. 그런데 라마단 기간에 도착을 해서 한 달 동안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국내의 상황에 그렇게 대단히 이상한 징후는 없었다.
오히려 카터 대통령 방한 후에 국내적으로는 잠시나마 사상범들에 대한 석방 등으로 여야 관계가 호전돼 가던 시기였다. 이때 제가 부임을 했다. 아시다시피 이집트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데 한국과는 영사관계라서 외교관계로 격상시키는 것이 커다란 현안 중의 하나였다. 북한과 대한민국은 공히 1961년에 각각 이집트와 영사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한국은 1961년 12월에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그에 조금 앞서서 북한은 같은 해 7월 말에 총영사관을 개설한다.
우리는 영사관계를 수립한 다음 해인 1962년 5월에 카이로에 총영사관을 설치한다. 그래서 초대 총영사관으로서는 후에 외무차관, 그리고 주불대사를 지내신 윤석헌 대사님께서 부임을 하셨고, 1년 남짓 계시다가 곧 주미대사관 공사로 전임을 하셨다. 그때 주미대사로 부임했던 김정렬 대사께서 윤석헌 대사를 꼭 공사로, 차석으로 쓰시겠다고 하셔서 윤석헌 대사께서 부임해서 1년이 채 안 되는 상황에서 워싱턴으로 전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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