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욱 처장은 일에 대한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한국의 원전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대단했다. 처음 수원에게 연락을 취해 왔던 날도 똑같았다.
“한수원 박사시죠?”
“네. 그렇습니다.”

“저는 한국수력원자력 주식회사의 강병욱 정책처장입니다.”
강 처장은 구구한 설명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발표하신 주제어시스템 논문을 보고 우리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분이라 생각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강 처장은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고국을 위해 일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 고국이라는 말에 수원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준 열사가 말씀하시기를,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다. 땅이 작고 인구가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다’고 하셨습니다.”

강 처장의 확신에 찬 권유에 수원은 그 자리에서 수락을 했었다.
“처장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사고 현장 수습을 맡은 본부 직원이 땀을 흘리며 뛰어 들어왔다.
“프랑켄슈타인이 된 기분이야.”

강 처장의 말에 수원과 배성민은 쿡 웃었다.
“그래, 조사는 좀 해 봤나?”
“네. 알제리 회장 차는 우리 회사에서 알선해 준 렌터카였습니다. 운전사도 렌터카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강 처장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통증이 오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 배치된 운전사는 기사 대기실에 곯아떨어져 있고, 엉뚱한 자가 운전을 했나 봅니다.”

“뭐야? 운전사도 폭발 차에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 운전사는 어떻게 됐어?”
“병원으로 오는 도중 사라졌습니다.”
“알제리 회장을 노린 것이 틀림없군.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폭발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목숨까지 노린 것은 아니고, 겁을 주는 차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찰도 그렇게 보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아, 배고프다.”

병원 밖으로 나오면서 성민이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직 저녁 식사 못했어요?”
“응. 함께 가 줄래?”
성민이 수원의 어깨를 슬그머니 감싸 안았다.
“그래요.”

수원은 어깨에 얹혀 있는 성민의 손을 슬그머니 떼어내며 대답했다.
성민은 수원과 함께 무역회관 지하에 있는 와인 바로 갔다. 넓은 공간,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 어슴푸레한 조명, 마치 중세 살롱에 들어선 듯했다.
성민은 칸막이가 있는 구석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때? 가끔 혼자 오는 곳이야.”

테이블에 놓인 가스등 불꽃이 성민의 얼굴에 그림자를 수놓았다. 와인 바의 분위기와 조각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성민의 얼굴이 잘 어울렸다.
“좋으네요. 숙소는 어디에 있어요?”
“스타타워. 외국인 장기체류 전문 호텔이지.”
성민이 수원을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비쌀 텐데.”

“하하. 걱정은⋯”
성민은 미국에서 둘이 자주 마시던 빌라 엠 로쏘 두 잔을 시켰다. 맛이 순해 홀짝홀짝 마시기는 좋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감당할 수 없이 취하는 술이었다. 저녁 식사를 대신해서는 안주로 수제 소시지 볶음을 주문했다.

성민은 미국에서도 비교적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자라 사고방식이 미국인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 같은 계통에 종사하다 보니 두 사람은 세미나에서 자주 마주쳤다. 미국인이 다 된 배성민이었지만, 동족인 한수원이 마음에 끌렸는지 먼저 접근해 왔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안개 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언덕길에서 처음으로 키스를 나누었고,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금문교에서 함께 태평양을 내려다보곤 했다. 거기서 101번 하이웨이를 달려 도시 북쪽 노브힐 지역 정상의 샌프란시스코 대성당에도 자주 갔다. 고딕식 순수함과 장엄함이 서려 있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의 이미지를 많이 풍기는 곳이었다. 대리석 벽, 파란색 장미 문양의 창, 모든 것이 파리 유학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비탈길에 깔린 낙엽 위에 앉아 정담을 나누고, 이듬해엔 봄꽃이 만발한 샌프란시스코 시내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수원은 성민의 세련된 분위기에 매료됐고, 여자를 배려할 줄 아는 자상함에 빠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1년도 못 가 깨지고 말았다.

2년 전 그날, 수원과 성민은 웨스팅하우스의 ‘비오피’ 세미나에 나란히 참석했다. ‘비오피(BOP)’란 밸런스 오브 플랜트(Balance of plant)의 약자로 원전의 터빈을 돌리는 수증기 공급 계통을 말한다. 원자로에서 핵분열로 발생하는 열을 간접 전달 받은 제2회로 공급순환수는 섭씨 270도가 넘는 어마어마한 온도로 증기를 만들어 발전 터빈을 돌린다.

“내일 한국에 들어가. 아마 한 달쯤 있다 올 거야.”
세미나가 끝나고 복도를 걸어 나올 때 성민이 불쑥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수원은 평소와 달리 통고하는 듯한 성민의 말투에 약간 심사가 뒤틀어졌다.
“집안의 재판이 걸려 있거든.”

성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1930년대에 일본 작위를 받은 귀족이었어. 그런데 패전 후 정부에 재산을 몰수당했지.”
“패전?”

성민은 일본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듯했다.
‘해방이 아니라 패전이라고?’
수원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재기하셨어. 자유당 중요 간부까지 지내셨지. 4.19 때는 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셨어. 낙선은 했지만.”
이후 국내에서 친일 인사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성민의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이었다.

“내가 가서 할아버지가 정부에 억울하게 빼앗긴 재산을 되찾을 거야.”
성민은 주먹을 쥐어 보였다.

수원은 요즘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에 환수된 조상 땅을 돌려받기 위해 열심이라는 신문기사가 기억났다. 성민도 그 일에 적극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청담동에 있는 그 땅만 되찾으면 어느 나라에서든 귀족으로 살 수 있어. 그쪽은 아파트 한 채가 40억도 넘는다더군.”

성민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아무런 비판 의식이 없는 듯했다. 조국에 대한 애정도 전혀 없었다. 항상 고국을 먼저 생각하는 수원과 정반대였다. 
[계속]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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