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계절은 어느덧 깊은 가을로 접어들었다.

지장사를 오르는 계곡 산자락의 타오르는 단풍은 설악산 천불동의 그것 못지않았다. 온 산이 불타는 듯한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장관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사는 생명의 절정이었다.

만지면 묻어날 듯 파란 하늘을 응시하던 이제현의 마음도 불현듯 불타올랐다. 그는 머지않아 이 계곡이 흰 눈으로 뒤덮여 태고의 정적으로 되돌아갈 장관을 생각했다. 붉은색과 흰색, 그 원색의 조화가 그의 눈앞을 희롱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철원의 밤은 유달리 빨리 찾아왔다. 고암산 너머로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이제현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10년 전 주원장의 장자방이 된 유기(劉基)는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재주를 갖추었고, 귀신도 습복(服, 두려워서 굴복함)시키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으며, 병법에도 통효(通曉, 통달하여 환하게 앎)하고 천문지리에도 능통한 현인이다. 주원장이 북벌을 전개해서 마내 제업(帝業)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실은 순전히 유기의 계략에 따른 결과가 아니런가.

이제현과 유기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았다. 유기는 중국인들에게 ‘예언의 명인’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제현도 유기 못지않게 천문, 지리, 주역과 음양오행에 밝아 도인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시대적 소명이 달랐다. 이제현은 쇠망해가는 고려의 국운을 연장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 유기는 새로운 한족의 나라(명나라)를 건국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제현은 종종 유기를 자신과 비교했다.

‘유기는 주원장을 만나 10년 만에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건만, 나는 시중을 네 번이나 역임했지만 한 일이 무엇인가. 귀밑머리 희끗한 노년의 쇠락을 넘어 죽음을 기다리는 비감의 주인공이 아니던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제현은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나도 한 때는 쇠락해 가는 고려를 부흥시키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천고의 인걸’이 되고 싶은 미망(迷妄)에 사로잡혔던 시절이 있었지. 그러나 일구월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의 표상은 되었건만 암군(暗君)의 길로 치닫는 사위 공민왕을 막을 길이 없으니……. 아 어찌할꼬. 고려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하구나. 차라리 헛된 생각 안 하는 청빈한 선비의 살림을 하고 살았던들 한평생 후회를 남기진 않았을 텐데…….

사람의 목숨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언제나 천 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이 몸이 죽으면 부귀도 공명도 모두가 허무로 돌아가고 말뿐. 세상에 있을 때에 정신이 흐려져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 뉘우친다 한들 때는 이미 늦었을 터이니…….    

참선(參禪) 공부에 정진

세상은 속절없고 몸뚱이는 새털처럼 덧없는 것이다.

이제현은 말세일수록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자리를 바로 보는 참선(參禪) 공부에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1366년(공민왕15) 10월 16일. 마침내 이제현은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갔다. 그는 인간의 몸은 잠깐 빌려 입은 옷일 뿐 ‘참 나’가 아님을 깨닫는 게 바로 선(禪)이라고 생각했다.

노년의 시간은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빨리 지나갔다. 이제현은 명년 정월 보름까지 90일 기도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하고 ‘결동(結冬, 동안거의 시작)’을 했는데, 시작이 반이라고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 ‘해동(解冬, 안거의 끝)’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현은 줄곧 앉아서 홀로 화두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신묘한 지혜와 마음을 찾는 데 ‘90일 안거’는 오히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목을 벨 도끼가 눈앞에 있고 몸을 삶을 가마솥이 제 뒤에 있어도 이제현은 꿋꿋이 굽히지 않은 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경의 조정에서 그를 비방하고 헐뜯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밝은 지혜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현은 몸 안에 죽어있던 세포가 살아나듯, 가뭄으로 갈라졌던 땅이 비를 만난 듯 참선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어느덧 동짓달이 지나가고 섣달도 거의 다 가서 세밑이 다가왔다. 함박눈이 펄펄 쏟아져 밤사이에 쌓인 눈이 무릎까지 찰 정도가 되었다. 이제현은 자신의 생의 마지막 겨울을 살아 있는 아무도 없는 지장사의 순수한 백설, 때 묻지 않은 눈송이 속에서 포근하게 지냈다.

해가 바뀌어 정미년(1367, 공민왕16) 새해 아침이 밝았다.

지장사 대웅전 뒤쪽 모퉁이를 끼고 조금 올라가면 문둥병까지도 거짓말처럼 고친다고 하는 약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

이제현은 새해가 동트기 전인 새벽녘에 살을 에는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약수물로 목욕 재개했다. 그리고 대웅전에 나아가 한 해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고 나온 대웅전 밖은 제일(除日, 섣달그믐) 밤에 내린 눈이 온 천지를 새하얗게 치장한 설경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지장사의 스님들은 이제현과 주지스님에게 하례를 올리면서 ‘10년 만에 드문 서설(瑞雪)이 내렸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雪豊年之兆 설풍년지조)’는 덕담을 나누었다. 대웅전 앞마당의 눈을 치우고 난 후 모든 승려, 보살, 처사들은 떡국으로 아침 공양을 했다.

이날 오전, 정월 초하룻날이라 지장사에는 많은 불자들로 붐볐다. 시중을 지낸 이제현이 참선을 하고 있는 도량이라 유명세를 탄 탓도 있었으리라. 어린 아들딸의 양손을 잡고 대웅전 뜰 앞을 기웃거리는 젊은 부부들, 오로지 자식들의 앞 일이 잘되기만을 기도하러 온 중년 부인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알 수 없는 처녀들의 모습이 이제현의 눈앞에 어지럽게 펼쳐졌다.

주지스님 방에서 차를 나누며 담소를 하던 이제현이 불쑥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자혜 스님에게 꺼냈다.

“섣달그믐이 되는 어제 새벽녘에 꿈을 꾸었다오. 망건 쓰자 파장인 꼴을 한 늙은 선비가 개성 황궁 광화문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거야. 인시(寅時, 새벽 4시경) 무렵인 오경삼점(五更三點)에 33천(天)의 뜻으로 33번을 치는 파루(罷漏)가 울렸는데도 통행금지가 해제 되지 않고 있었어. 날씨는 엄동설한이라 추웠고 성문은 수문장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지. 그때 꿈속에서 그렇게 떨면서 수문장에게 문을 열어 달라며 한없이 애원하고 있는 그 노인의 모습은 영락없는 한 그루의 늙은 고목나무였지. 너무나도 그 노인이 가여워서 내가 그 노인을 불렀지. 측은지심에서 말이야. ‘여보시오, 노인장. 그렇게 추위에 떨지 말고 내 겉옷 도포라도 입고 추위를 더는 것이 어떻겠소.’ 그런데 그 노인이 다짜고짜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나는 춥지 않소. 다만 마음이 아프다오’ 이러는 것이었소.”

자혜스님은 꿈 해몽을 그럴싸하게 하며 이제현을 위로했다.

“시중 어른, 추위에 떠는 노인과 늙은 고목나무는 바로 도포를 빌려준 노인인 시중 어른의 자화상입니다. 그래도 초하루가 아닌 그믐에 꿈을 꾸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리고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좋은 일인 것 같으니 괘념치 마세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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