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명주씨, 독수공방 쓸쓸하게 보내게 해서 미안. 미안”
남편 최정식은 한잔 들었는지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말을 하면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명주를 껴안았다. 명주는 입에서 풍기는 알콜 냄새와 독한 담배 냄새가 싫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유난히 명주가 싫어하는 ‘하나로’인가 뭔가 하는 담배를 노상 물고 다녔다.

“출장 간 일은 잘되었나요? 어서 목욕하고 저녁 드세요.”
나명주가 남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는 회사 일로 어제 부산에 출장 갔다가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동차 회사 영업부 고객과장으로 있는 그는 최근 들어 출장이 부쩍 잦아졌다고 명주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 나 목욕도 하고 저녁도 먹었어. 침대로 직행할 테니 당신도 빨리 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명주는 부엌을 대강 치우고 화장을 지운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어느새 침대에 들어가 잠을 청할 듯한 피곤한 기색으로 누워 있었다.
“마이 다알링, 어서 와요”

그가 침대에 누운 채 두 팔을 벌려 명주를 안았다. 그러나 명주는 이럴 때마다 남편이 마지못해 자기를 상대해 주는 듯한 서먹함을 느껴야 했다. 여자만의 육감이라고 할까, 남편 최정식이 무언가 자기를 속이는 게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 부부가 결혼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아직 아이는 없으나 이렇다 할 부부 싸움이나 권태감 같은 것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는 같은 직장의 동료요, 상사와 부하 사이였다. 인물 좋고 예의 바른 노총각 최정식은 영업부 여성들의 선망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 서구적 마스크의 허미련과 아직도 시집을 못 간 경리과의 김윤희와 나명주는 맞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승리는 나명주가 차지했다.

나명주는 이내 잠이 들어 코를 골고 있는 남편의 요즘 행동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사주지도 않은 화사한 넥타이를 매고 오는가 하면 양복을 입을 때도 전에 하지 않던 짓을 했다.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보는가 하면 면도질도 유난히 정성스럽게 했다.
‘혹시 다른 여자가...?’

나명주는 얼핏 그런 생각을 했으나 고개를 저으며 잠을 청했다. 이튿날 친정에 다녀오던 나명주는 남편 회사 앞을 지나다가 문득 옛날 동료 생각이 나서 지하 다방에 들어가 허미련을 불러냈다.

“얘, 넌 시집 안 가더니 더 예뻐졌다. 난 아줌마가 다 되었지?”
명주가 수다를 떨자 허미련은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리 그이, 아직도 회사에서 인기 있니? 결혼하고 나니까 거들떠보는 아가씨들도 없지?”

나명주는 이렇게 말하며 허미련의 표정을 살폈다.
“그럴 리 있어? 결혼도 결혼 나름이지.”
허미련은 무표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수다를 두 시간 동안 떠들다 집으로 돌아온 나명주는 뭔가 떨떠름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경리과에서 일하는 김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 너 이유 묻지 말고 내 부탁 좀 들어줘.”나명주가 심각하게 나가자 그녀도 진지하게 대꾸했다.
“알았어, 기집애두, 그래, 뭐야?”

“우리 최 과장, 어제 출장 갔던 여비 지출 영수증 있지?”
“응, 있긴 있지. 근데 아직 결재 안 끝났다.”
“영수증에 적힌 출장지 호텔 이름 좀 가르쳐 줘”
“뭐야”

“이윤 묻지 말랬잖아”
나명주는 이튿날 비행기로 부산에 내려가 김윤희가 가르쳐 준 호텔로 찾아갔다. 호텔이라기보다는 장급 여관 같은 곳이었다. 나명주는 프런트의 총각에게 팁을 듬뿍 집어주고 남편이 투숙한 날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최정식? 아, 여기 있군요. 2층 14호실.”

“동행자 이름은 없어요?”
“우리 장은 보통 한 사람 이름밖에 안 쓰지요.”
“최정식이란 사람, 누구랑 같이 오지 않았어요?”
“손님들이 한두 명이라야지….”

“최정식 씨한테 준 계산서 한 장 복사해 줄 수 있어요?” 그는 금방 방값과 음식값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자기들 서류 처리용의 계산서 사본을 떼어주었다.

 
214호실 계산서
객실료 4만8000원
석식 1만1000원(복매운탕과 토스트, 20시 배달)
담배 1 700원(06시 배달)
커피 1 (6시)

이 계산서를 들고 나명주는 부르르 떨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녀는 그날 밤 남편이 돌아오자 시어머니 시아버지 앞에서 정색하고 따졌다.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 마세요? 그 여자가 누구예요? 부산 모텔에서 아니 요즘 풀장 핑계로 같이 다니는 그 여자! 허미련이죠?”
최정식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얘야, 에미가 증거를 다 갖고 있으니 실토하고 처분을 기다려라.” 시아버지의 말에 최정식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여보 내가 죽일 놈이야.”

 

퀴즈. 나명주는 무슨 증거를 가졌을까요? 

 

[답변 - 2단] 호텔 계산서 중 석식은 2인분이다. 매운탕과 토스트를 함께 먹는 사람이 있겠는가? 또한 최정식은 하나로 담배만 피우는데 그 값은 1000원. 아침 6시 객실에 담배를 배달했다면 그 방에 같이 잤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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