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너...”
수원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랜만에 본 유미는 너무도 변해 있어 낯선 느낌까지 주었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사색을 즐기던 모습은 간 데 없었다.
“우리 진짜 인연이다. 파리가 아닌 한국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언제 들어왔어? 무슨 일 하고 있는 거야?”

고유미는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 부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어머, 내 정신 좀 봐. 인사해요. 여기는 한수원 박사. 파리대학 친구.”
유미가 남자에게 수원을 소개했다.

“정세찬입니다. 이름처럼 세찬 사람은 아니고요.”
까무잡잡한 얼굴에 유행이 지난 양복을 입고 있었다. 굵은 테 안경과 손에 든 낡은 가방이 영락없는 학자 스타일이었다. 유미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이쪽은 배성민 박사. 미국 근무할 때 만난 연구원이야.”

수원의 평범한 소개에 성민은 섭섭한 얼굴빛을 지었다.
“이렇게 만났으니 함께 자리를 옮길까요?”
자정이 넘자 문을 닫는 가게가 많았다.
“제 숙소가 여기서 가까운데...”

성민의 제안에 일행은 스타 타워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미가 파리 시절처럼 얼른 수원의 팔짱을 꼈다. 둘은 금세 남자들 뒤로 처졌다.
“어쩜 넌 그대로다.”
유미가 수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생긋 웃었다.
“넌 좀 변한 것이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데?”
“그래? 더 예뻐졌다는 말씀?”

애교는 여전했다.
“사귀는 사람이야?”
“세찬 씨? 음-. 말하자면 그렇지.”
유미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보기엔 저래도 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땄어. 외국에 남으려 했는데 일이 좀 안 풀려서 귀국했대. 지금은 한국에서 대학 강사로 뛰고 있어. 부모님도 친척도 모두 외국에 있어서 좀 외로울 거야. 척 보기엔 고지식해 보여도 은근히 재미있는 구석이 많아. 야심도 크고. 나랑 잘 맞지. 그런 면에선.”
“네가? 야심가라고?”

“어머, 몰랐니? 난 너도 그런 줄 알았는데? 국제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잖아.”
“아, 그거?”
‘판도라’ 사이트 활동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건 핵에 관한 관심이었지.”

“흐응, 그랬구나.”
유미가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 타워 호텔 15층. 성민은 이곳을 집무실 겸 거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널찍했다. 시원하게 트여 있는 거실에는 편안해 보이는 가죽 소파와 심플한 컴퓨터 책상이 놓여 있었다. 거실 한쪽에 미니 바 같은 주방이 자리잡고 있고, 거길 지나면 아늑한 침실과 욕실이 연이어 있었다.

“야, 정말 좋은데요.”
성민의 숙소를 둘러보던 유미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에드워드 호퍼네요?”
유미가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예. 그렇습니다.”

“외국인 장기 체류자 호텔과 고독을 그리는 화가! 기가 막히는 조합이군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미는 문화 예술 부문에 박학다식했다. 유미는 지긋한 눈으로 그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자, 편하게 앉으세요. 술 한잔 하셔야죠?”
“좋습니다.”

정세찬이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 앉으며 대답했다.
“술은 뭘로 할까요? 이 방에는 와인밖에 없어서. 룸서비스로 시킬 수도 있지만... 로제 바바리안과 샤토 오브리옹이 있어요.”
“샤토 오브리옹이 있다고요? 멋져라. 파리가 생각나네요.”
유미가 두 손을 모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샤토 오브리옹으로 하겠습니다. 안주는 치즈와 호두밖에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배성민이 몸에 밴 친절함을 내보이며 물었다. 곧이어 작은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두 분은 이 시간까지 뭐하고 계셨습니까?”

성민이 잔을 건네며 유미에게 물었다.
“그냥 데이트죠 뭐.”
유미가 정세찬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정세찬은 멋쩍은 듯 그냥 미소만 지었다. 웃는 얼굴이 선해 보였다.
“두 분도 데이트?”
“우린 업무상...”

성민이 그렇다고 말하려는 순간 수원이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성민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난 파리에서 돌아온 뒤 고생 많이 했어. 이곳저곳 알아봐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더라고. 전공이 동양철학이다 보니 연구소밖에 갈 곳이 없었어. 그런데 번듯한 연구소는 자리가 나지 않고, 조그만 연구소는 월급이 너무 적고.”
고유미가 한탄하듯 말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연한 갈색으로 물들인 구불구불한 머리가 성숙미를 풍겼다.

“저런.”
수원이 안타까워 한숨처럼 말했다.
“그러다 바이오 과학 계통의 잡지사에서 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시했어. 뜻밖에 채용이 됐고. 지금은 나름 기자랍니다.”
“과학 기자가 아니라 패션잡지 기자 같으신데요?”
성민이 유미의 옷매무새를 훑어보며 말했다.
“멋있다는 말씀이시죠?”

유미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공과는 완전히 빗나간 호구지책이지만 일은 재미있어요. 과학과 국제 정치 문제에 관한 인터뷰를 하러 갔다가 이 사람을 만나게 됐어요. 세찬 씨는 한국대학에서 국제정치학 강의를 하고 있어요.”

유미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동안 정세찬은 줄곧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그럼 진도는 어느 정도 나갔나요?”
성민이 유미와 정세찬을 바라보며 짓궂게 물었다. 정세찬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짓자 유미가 얼른 대답했다. [계속]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