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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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미국 정부 측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감형 문제를 요구했다”
“군부 내에서 극렬한 반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타결됐다”

▲ 또 한 가지는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문제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가 정부 내에서 조용히 추진되고 있었는데, 뉴욕에 있는 체이스맨하탄은행 총재인 데이비드 록펠러씨의 개인 초청으로 미국을 가셨다가 워싱턴으로 가시는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1980년 노신영 장관이 부임을 하고 나서 이 사실을 알고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가신다면 미국 정부의 공식초청으로 가셔야만 옳은 일입니다”하고 말씀을 올렸고, 다행히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교섭 창구는 외무부로 일원화됐다.
그래서 그 결정을 받고 1980년 12월 20일, 제가 부임하기 바로 전에 전임자인 박쌍용 정무차관보가 노신영 장관의 친서를 휴대하고 워싱턴의 당시 김용식 대사를 비밀리에 방문한다. 그래서 김용식 장관에게 전두환 대통령 방미 초청 문제를 교섭하도록 했다. 훈령을 전보로 하지 않고 차관보가 직접 편지를 들고 가서 전했다. 그렇게 김용식 대사와 공화당 인수팀의 외교관계 책임을 맡고 있던 리처드 알렌간의 교섭이 진행됐고,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첫 외국 빈객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초청하기로 결정됐다.
그런데 이 초청 교섭에서 커다란 난관이 하나 있었다. 미국 정부 측에서 김대중씨 사형 문제의 감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국내에서 꺼내기에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다.

-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였겠다.

▲ 그렇다. 당시 노신영 장관의 말씀을 들어봐도 전두환 대통령은 이해를 하시는데 그 주변이 하도 강경하니까 상당히 조심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는 우리 측이 양해했고, 결국 초청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당시 특별기를 타고 갔는데, 가는 도중에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 옆에 있는 트래비스 군용비행장에서 급유를 하고 LA에 가서 1박을 했다. LA에서 내리는 뉴욕 워싱턴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전날 관계각료들 간의 준비회의를 했다. 그 자리에서 주영복 당시 국방장관이 굉장히 강한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김대중 대통령 감형 문제는 강경한 군부 내에서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시다시피 1월 28일부터 2월 7일까지 10박 11일간의 공식방문이 이루어진다. 당시 인상적이던 일이 있었다. 백악관에서의 정상회담에 앞서서 알렉산더 헤이그 장관을 만났더니 “You will never hear any public criticism or public advice from us”라 한다. 이제부터 미국에게서 한국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충고 등을 공개적인 좌석에서 듣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 이야기가 귀에 쟁쟁하다. “미국은 베트남전 때 한국이 미국을 도운 일에 대해서 잊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우리는 사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도운 것을 잊지 않고 있어서 베트남에 출병을 한 건데, 그리고 최소한 앞으로 4년간 한국은 백악관에 한국의 친구가 있다는 것을 믿어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사실 이 방문으로써 그동안에 한·미 간의 불편한 관계가 일소됐다는 평가를 할 수가 있다.
또 우리가 차기 주력전투기로 구입하기를 희망했던 F-16 전투기 구매를 미국이 당장 승인하겠다고 해서 F-16 전투기가 도입이 됐다. 최근에 새로운 차세대 전투기를 구입한다고 하는데, 그전까지는 F-16이 주력전투기였다. 그리고 한·미 정상회담이 2월 2일 백악관 지하의 캐비넷룸에서 있었다. 거기서 이야기된 중요한 것이 “한국으로부터 미군 철수 논의는 앞으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방위공략은 충실히 이행하겠다. 또 북한과의 협상에 있어서는 한국의 참여 없이는 안 한다. 김대중씨에 대한 처리 문제는 잘했다고 보며 그것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지원에 훨씬 수월한 여건이 조성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다음에 정상회담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 한국은 알다시피 미국의 굳건한 지원하에 동아시아에 있어서 반공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지역안보에서 일본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미국이 한국에 2개 사단을 주둔시키고 있는데 최소한 그것에 해당하는 만큼의 비용은 한국에 경제협력을 해줘도 좋지 않느냐. 우리는 국민총생산(GNP)의 6%를 국방비에 쓰고 있어서 우리 예산으로서는 33%를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다. 일본은 GNP가 1조6000억인데 그것의 0.9%를 방위비로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14개항의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계획은 없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공동성명에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이 1981년 1월 12일에 남북 당국 최고책임자 간의 상호방문을 제의한 일이 있다. 이 제의는 미국으로서는 상당히 높이 평가해서 미국이 지지를 밝히고, 그다음에 미국은 한국의 참여 없이는 북한과 여하한 협상도 안 하겠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다. 그다음에 1970년대에 5억3100만 달러 정도였던 우리 대미 교역 규모가 1980년대에는 100억 달러로 확대된다. 이것에 대해서 지금 양국은 만족을 표명하고, 한국이 당시에 미국의 12번째 교역 대상국이 됐다는 데에 유의를 했다. 그다음에 에너지 문제에 대한 협력을 양국 정상이 확약하고, 특히 핵 연료에 대해서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리고 양국 정상이 민간교류 촉진을 위해서 양국이 공동으로 출자해 한·미 문화교류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의하고, 특히 미국 측에서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한국 국민들이 다액의 기부를 해준 데 대해서 사의를 표명하는 내용이 당시 공동성명에 담겼다. 말하자면 과거 불편했던 양국관계가 일거에 해결된 양상을 보여줬다. 이후 귀국길에 대통령이 관계 각료들을 대통령 특별기 안의 대통령실로 불러서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 노신영 장관이 저를 불러서 “공 차관보, 일본하고의 경협을 이제 시작해야겠다. 지금 대통령께서 대일 경협 지시를 했다”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일본에 대한 경협에 불이 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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