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속도로 램프까지 진입했어요.”
“램프라고요? 하하하. 빨리 속도를 내셔야겠네요.”
성민이 과장되게 웃었다.

“그쪽은 진도가 얼마나 나갔는데요?”
이번에는 유미가 역습을 했다.
“우린 고속도로 지나온 지 한참 됐어.”
수원이 재빨리 대답했다. 성민이 수원을 쳐다보았다.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 챈 유미가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이 다 비슷한 일을 하고 있네요.”
유미는 수원과 성민, 세찬을 둘러보며 말했다.
“세 사람이요?”

“네. 세찬 씨도 핵과 관계가 있답니다.”
“국제 정치학을 가르치신다면서요?”
성민이 물었다.
“맞습니다. 제 마지막 논문 주제가 ‘박정희 정부와 미국의 핵 마찰에 대한 연구’였거든요.”
“아, 그랬군요.”

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 중 박정희만큼 핵을 열망했던 인물이 없었을 겁니다. 선견지명이 있었지요. 앞으로 국제 정치와 외교, 무역에서 핵이 최우선 화두가 될 것입니다.”
조용히 있던 정세찬이 핵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나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한다면서 국제 조약에 덜컥 서명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김정일 보세요. 핵을 국제 정치의 무기로 활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핵은 정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정치라기보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빨리 핵 주권을 찾아야 합니다.”

“박정희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 박 대통령이 지미 카터와 신경전 벌인 것이 핵 때문이란 것 맞나요?”
수원이 눈빛을 빛내며 질문했다.

“박-카터의 갈등이 표면적으로는 인권문제라고 했지만 실은 핵을 둘러싼 국익 싸움이었습니다. 지금 김정일과 오바마가 싸우는 주제와 같은 것이지요.”
“박정희가 핵폭탄을 만들려고 했나요?”
수원이 다시 물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박통이 늘 외치던 유비무환, 자주국방의 목표를 실현하는 가장 빠른 길이 핵무장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려웠던 시절 아닙니까?”
성민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물었다. 이미 술을 해서 그런지 샤토 오브리옹의 효과가 빨리 나타나고 있었다.

“1978년 초, 미국의회는 인권보고서에서 한국에 몹시 나쁜 점수를 주었습니다. 소위 개발 독재가 한창인 유신시대였으니까요. 카터는 자기 선거 공약대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요. 박정희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살 길은 핵이다’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수원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정세찬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해 4월 20일 무르만스크에서 대한항공 902편이 강제 착륙 당했습니다. 이 사건과 한국의 핵 유입 문제가 관계있다는 말이 최근 국제 정치학회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또 그해 5월19일에 동해에 침투한 북한 무장 간첩선을 해군이 격침시키고 북한 선원 8명을 체포한 일이 있었습니다. 조선인민 무력부 직속 제612전차 수리대 군용 수송선이었습니다.”

“수송선을 간첩선이라고 한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조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던 성민이 끼어들었다.
“어쨌든 그들을 포로로 다루고 있는 한국한테 미국이 간섭을 해왔습니다. 생포 후 열흘쯤 지난 6월 1일 미 대리대사가 외무부를 찾아와서 북한 사람들을 조속히 송환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미국 측에서 쓴 용어가 ‘innocent intruder’였습니다.”

“무고한 침입자라는 주장이군요. 미국이 왜 그렇게까지 나선 걸까요?”
“공산 종주국 소련을 자극하지 않고 무르만스크의 한국 여객기를 돌려받으려는 계산이었을 겁니다.”
그때까지 소련은 강제착륙시킨 대한항공 902편 여객기를 억류해 놓고 있었다.
“저기, 원자력 발전소 위험하지 않아?”

갑자기 유미가 수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방사선에 고운 피부 다 상하는 거 아니야?”
유미의 발음에서 공기가 조금 새는 것 같았다. 유미도 술기운이 도는 듯했다.
“노 프로블럼. 방사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가장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어. 세상의 모든 물질에서 조금씩 방사능이 발산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원자로 곁에 있으면 자연 환경에서 나오는 방사능까지 완벽하게 차단돼.”
“하하하. 어련하시겠습니까.”

정세찬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마시더니 태도가 호방해졌다.
“어쨌거나 이제 그곳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겁니다.”
“네? 세계의 주목이라니요?”
수원이 말뜻을 되짚어 물었다.
“아,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핵발전소를 전 세계에 수출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정세찬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어느 틈에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5. 시간을 초월한 핏줄
수원은 이튿날 오후 늦게 고리 원전 본부로 돌아왔다. 하루 내내 배성민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매력과 혐오를 함께 지닌 남자, 그것이 수원의 마음에 비친 배성민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수원은 우선 주영준 차장의 방으로 먼저 갔다.
“큰 일 치르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영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인사를 했다.
“행사는 대성공이었는데, 폭발 사고 때문에...”
“그렇잖아도 강 처장님께 전화 드렸습니다. 파편 뽑아내고 찢어진 곳 몇 군데 꿰맨 정도니 걱정 말라고 하시더군요.”

영준은 일단 안심을 하면서도 퇴근 후 서울까지 가서 병문안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수사에 진전된 사항이 있습니까?”
“본래 알제리 회장 차를 운전하기로 배정됐던 렌터카 운전사는 대기실에 있을 때 다른 운전사가 권하는 음료수를 먹고는 그대로 곯아떨어져 잤대요. 인상착의를 확인한 결과 폭발 시 자동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맞다는군요.”
“병원 가던 도중 사라졌다는 그 사람 말입니까?”

“네. 폭발물이 뒷좌석 밑에 설치돼 있었고, 폭발 강도가 약해 운전사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거라는 게 경찰 의견이에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범인 맞겠군요.”
“저도 그 차에 타기로 돼 있었는데, 알제리 회장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사고를 면했어요.”

“아, 그랬군요. 어느 좌석에 타기로 돼 있었습니까?”
“운전사 옆 좌석이요.”
주영준의 물음에 수원은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주영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계속]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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