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전두환 전 대통령 [뉴시스]
전두환 전 대통령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대일 경제협력 교섭에 대한 구상을 찍기 시작했다”
“당시 이토 수상이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 당시 국내외적 상황을 보면 한·일 양국 역시 협력 강화에 대한 의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알려지기로는 우리 군사정권이 일본에 대해서 부산 아카하타론, “부산이 공산주의 세력에 들어가면 일본의 안보에도 좋지 못하다”는 논리로써 대일 경제협력을 얻어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는 많은 논의가 있는데, 장관님께서 이 부분을 설명해주셨으면 한다.

▲ 아시다시피 대일 경협은 우리가 일본에 운을 떼고 나서 실제로 타결될 때까지 2년여의 세월이 걸렸다. 교섭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잘 설명해야 할지, 좀 어렵긴 하다. 역시 사건 진전의 추이에 따라서 설명할 도리밖에 없을 것 같다. 급작스럽게 기상천외한 대일 안보경협론이 나온 배경에는 몇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의 대일청구권 자금에 대해서 36년간 식민통치의 결과로는 그 액수가 너무 작은 거 아니냐는 인식이 상당히 깔려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GNP의 6%를 국방에 충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 예산의 33%를 차지했다. 지금 우리 국방비는 10%가 안 될 거다.
이러한 버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 비해서 일본은 여러 가지 한국의 안보적인 역할에 혜택을 보는 거 아니냐는 소위 무임승차론이 나왔다. 그래서 차제에 일본이 안보적인 측면에서 한국에 기여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또 하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1980~1981년에 우리 경제가 어려웠다. 1978~1979년부터 있던 오일쇼크의 영향도 있었고, 인플레이션이 20%를 넘나드는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경제가 숨통을 트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최고 위정자로서 특히 경제가 좋아야 민심도 후해지니까 그런 생각이 상당히 강했을 거다.
게다가 1980년 장충단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이 됐으나 12·12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등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니 새로운 군부에 대한 내외의 차가운 시선이 있고, 또 정체론도 부단히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군부가 집권하자마자 군인들로 구성된 군사사절단을 각국에 파견해서 한국 상황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정호용 당시 특전사사령관이 단장으로 나간 사절단이 미국에 갔다가 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만나게 된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정호용 사령관을 만나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 좀 더 경제적으로 기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일제 시대에 한반도에 2개 사단을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미국의 2개 사단하고 우연히 일치되는데, 실제로 2개 사단이 서울 용산과 함경북도 나남에 있었다. “2개 사단이 소위 일제 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단을 유지할 만한 비용은 최소한도 우리가 한국에 원조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고, 그것이 보고가 됐다. 저는 당시 이 보고서를 우연히 보게 됐다. 방미 행사가 끝난 후에 당시 김경원 비서실장이 저를 부르더니 “이제 이 서류 필요 없으니 가져가세요”하고 줬는데, 그게 이 사절단들의 보고서다. 그중에 정호용 장군의 보고서가 있는데 거기에 그런 내용들이 있더라.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의 머릿속에 이미 그런 생각이 있어서였는지, 2월 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야기가 나온 거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대일 경제협력 교섭에 대한 구상을 찍기 시작했다. 물론 경제 문제이기 때문에 경제기획원이 협력하고 청와대의 김재익 경제 수석이 지휘해 입안했다. 당초 경제기획원은 ODA 40억 달러, 민간차관 10억 달러, 합해서 50억 달러 안을 짰다. 그리고 이것을 5년에 걸쳐서 공여받고, 1년에 10억 달러씩 들여오기로 했다. 그때 일본이 5년에 걸쳐서 일본의 ODA 전체를 214억 달러로 배정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20% 정도를 생각해서 40억 달러, 거기에 민간자금 10억 달러를 보태서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이 안이 청와대 회의에 올라가서 100억 달러로 늘어났다. 50억 달러가 배증이 됐다.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맨 처음에 우리가 전두환 대통령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200억 달러였다. 그래서 “왜 200억 달러입니까” 물었더니, 미국 1개 사단을 유지하는 데 20억 달러가 든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5년이면 그런 계산이 나오지 않느냐. 그래서 이 안으로 일본과 협의하겠다고 했다.

- 갑자기 두 배가 늘어난 셈이다.

▲ 그렇다. 1981년 3월 30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한다. 제5공화국 헌법에 따른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는데, 취임식에 이토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참석했다. 이토 외상과 노신영 장관의 회담에서 한국의 안보가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은 60만 장병을 유지하고 있고, GNP의 6%를 부담하고 있으며 자유세계 안보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고 운을 떼어놨다. 그런데 재밌는 건 보통 취임식을 하면 그날 저녁에는 환영 리셉션이 있고 각 사절단에 대한 만찬도 있는데, 이토 수상이 모두 건너뛰고 일본에 돌아가버렸다. 사실 말하면 결례다. 그러면서 노신영 장관에게 1981년 6월 4일부터 6일간 일본을 방문해달라고 초청을 하고 갔다. 우리는 외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생각하고 마침 주한대사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스노베 료조 대사에게 100억 달러를 요청했다.
그때 우리가 국교정상화 이후 우리의 대일 무역적자가 205억 달러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특히 지난 3년 간의 무역적자 폭은 95억 달러인데 일본의 대한 경협은 13억 달러에 불과하니, 일본이 경제협력을 해줘도 되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이후 6월에 일본에 가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5월에 외상이 소노다 스나오로 바뀌어버렸다. 1978년인가 외상을 한 번 지낸 분이다. 소노다 의원은 지금 그 아들이 국회의원을 계속 하는데, 구마모토 출신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학병으로 나가서, 요즘 말로 하면 낙하산 부대, 일본말로 공중정진대의 중대장까지 했던 무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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