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귀양 간 최영 장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어느새 4월이 되었다.

정원의 담장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봄꽃들이 다 지고 송악산 기슭에서부터 송홧가루를 날리며 풋풋한 신록으로 물드는 초여름이 다가왔다. 온 세상의 만물들이 생기를 다시 찾고 있을 때, 이제현은 시름시름 자리에 눕게 되는 날이 잦아지고 있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어느 날. 이제현은 귀양가 있는 최영 장군이 불현듯 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지필묵을 대령시켜 서찰을 써내려갔다. 몸의 기력은 쇠잔해지고 손끝의 힘은 빠져 흔들렸지만 정신만은 청아하게 맑아왔다.

 

최영 장군에게.

천리 먼 길 배소(配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귀양가 있는 시련의 세월 동안에도 최 장군이 일구월심으로 고려 사직을 걱정하고 있다는 전언(傳言)을 듣고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월영즉식(月盈則食),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듯이, 신돈의 권세가 가히 하늘을 찌르고 있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할 걸세. 금상께서도 신돈의 전횡을 언제까지나 지켜볼 수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네.

요동 북부지역에서 새롭게 일어난 여진족의 금(金)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거란족의 요(遼)와 한족의 송(宋) 3국간에 중원의 패자를 가리기 위한 절체절명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고려는 비로소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고 왕조가 안정되어 국운이 융성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하게 되었네.

그러나 고려는 국력을 배양하여 대외진출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내부 파쟁에 빠져 날려버렸네. 그 결과 몽골로부터 계속되는 침략과 수난을 당하기 시작하여 100년 동안 어두운 역사로 신음하고 있는 것이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원나라의 급속한 쇠퇴와 중원의 질서 재편이 시작되고 있네. 고려는 중원의 정세를 냉철히 꿰뚫어 보고 밖으로는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안으로는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야 하네. 그것은 아마도 최 장군과 이색, 정몽주의 몫이 될 것일세. 고려는 이 마지막 국운 상승의 기회를 살려야 하네.

최 장군!

천도무친 상여선인(天道無親 常與善人)’이라는 말이 있네. 하늘의 도는 편애함이 없으며, 늘 착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법이네. 하루아침의 분노를 잘 이겨내면 반드시 복권되어 크게 쓰일 날이 돌아 올 걸세.

자네가 몸 성히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눈을 감으면 여한이 없겠네만, 나는 이미 수(壽)를 다 한 것 같네. 그럼 배소(配所)에서 돌아오는 그날까지 몸 성히 잘 있게.

                                    정미 16년 6월 20일. 익재 이제현 씀

 

이제현의 서찰은 가복인 만복을 통해 신돈의 감시망을 피해 최영에게 무사히 전달되었다. 최영은 배소에서 이제현의 서찰을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스승이자 고려 선비들의 사표인 이제현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문병 한 번 갈 수 없는 처지가 너무나 서럽고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최영의 절절한 답장은 만복을 통해 이제현에게 전달됐다.

 

시중 어르신 전상서(前上書).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소장이 계림윤에서 다시 이곳 배소로 옮긴지 어언 2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세월 불민한 소장에게 늘 따뜻한 사랑과 가르침을 주신 시중 어르신의 은혜에 감읍하고 있사옵니다.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서 처음에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유 없는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목표로 하고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다만 존재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깊은 회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동구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으며, 먼 산자락 너머 언덕길에 흙먼지가 일면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저승사자처럼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습니다.

그러나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도래하니 결코 경거망동하지 말고 은인자중하라’는 시중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고 난 후에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사옵니다. 이후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깨달음을 얻어 ‘죽음을 생각하면 삶에 충실해진다’는 진리도 깨우치게 되었사옵니다.

시중 어르신!

이 불민한 죄인, 남아의 일념을 달성할 때까지는 그 어떤 고초라도 참고 견딜 각오입니다. 만약 소장에게 다시 한 번 사직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장은 시중 어르신의 유지를 받들어서 이색, 정몽주와 더불어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여 국정의 난맥상을 바로 잡고, 고구려의 고토 요동 땅을 기필코 회복하겠사옵니다.

어르신은 어리석은 소장뿐만 아니라 고려의 선비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주신 사표(師表)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르신은 고려 조정과 백성들이 함께 걱정하고 돌봐드려야 할 존귀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부디 약한 마음은 거두어 주시기 바라옵니다.

바라옵건대 부디 만수무강하셔서 소장이 어르신께 따뜻한 술 한 잔 올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끝으로 소장의 단심(丹心)을 담은 시조 한편을 어르신께 바칩니다.

녹이상제(錄耳霜蹄, 주나라 목왕이 타던 준마)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설악(龍泉雪鍔, 명검의 날카로운 칼날)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

장부(丈夫)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세워 볼까 하노라.

                                                정미 16년 6월 27일. 최영 배상(拜上)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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