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7월로 접어들자 이제현은 병석에 누운 뒤 회복되지 않았다.

육신은 끝 간 데 없이 오그라들기만 하였다. 아들, 손자, 제자들이 정성껏 탕재를 달여 올리며 간청하였다.

“탕재를 드시고 기력을 회복하소서.”

그러나 이제현은 이렇게 말하며 먹지 않았다.

“나는 천명을 다했다. 대개 천하 만물로 생명이 있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인명은 하늘에 달려있고 육신은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아침 이슬 같거늘……. 어찌 천도(天道)를 어길 것이랴.”

무성한 정원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서걱대며 소리 내어 울었다. 다른 해에 비해 혹독한 더위가 이제현의 노환을 가속화시켜 육신조차 가누지 못하게 하였다.

“전하, 계림부원군께서 위중하다 하옵니다.”

이제현이 위중한 상태에 있다는 비보는 지체없이 공민왕에 전해졌다. 공민왕은 충격에 잠겼다. 더구나 명덕태후 홍씨의 비통함은 공민왕의 그것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명덕태후는 11년 위인 이제현을 마치 친정 오라비처럼 믿고 의지했다. 아들 충혜왕이 즉위한 해에 간신들의 모함으로 고향으로 추방당해 불우했던 시절, 자신을 위로하는 서찰을 보내주기도 했던 이제현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명덕태후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공민왕에게 말했다.

“주상, 친히 병문안을 가도록 하세요. 왕실로 보나 종사로 보나 이 나라의 큰 어른이십니다. 사사롭게는 주상의 장인 어른이 아닙니까?”

“태후마마, 잘 알겠습니다.”

여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수철동 이제현의 집은 많은 인파로 붐볐다. 나라의 지존인 공민왕과 혜비이씨가 전의와 내관들을 대동하고 문병 행차를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문병을 온 종친과 원훈들의 발길도 끊이지를 않았다.

임금의 행차 기별을 받은 이제현은 큰 아들 서종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임금에게 마지막 작별 문후를 드리기 위하여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며 혼신의 힘을 다 쏟아 의관을 정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현은 북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올렸다. 탈진하여 겨우 절을 마친 그는 혜비이씨의 부축을 받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했다.

“주, 주, 주상전하……,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말은 듣지 말고(附耳之言 勿聽言 부이지언 물청언),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시옵소서(親賢臣遠小人 친현신원소인). 고려의 억조창생을 위해 16년 전 처음 보위에 올랐을 때처럼 정사에 임하시옵소……서.”

아무리 큰 인물이라 해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는 냉철한 판단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제현은 너무나 명료하게 자신의 사후에 닥쳐올 공민왕의 폐정과 이에 따른 조정의 혼조, 그리고 신돈의 발호에 따른 공민왕의 비명횡사를 내다보고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한 것이다.

한편, 이제현이 육필로 작성한 <9조의 정책건의서>는 그날 큰 아들 서종을 통해서 공민왕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이제현이 공민왕의 폐정을 예상하고 조정의 혼조를 막기 위해 마지막 충간을 서면으로 올린 것이다. 실로 시대를 관통하는 무서운 통찰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7월 처서가 지났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하얀 손수건을 하늘에 대고 흔들면 금세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청명한 하늘이 개경을 물들이고 있었다. 백중의 호미씻이도 끝나는 무렵이라 ‘어정칠월 건들팔월’로 농촌은 한가한 한때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이제현의 집안은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돌아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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