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해동의 명재상, 81세로 영면하다

정미년(1367, 공민왕16) 7월 계묘일 아침.

이제현은 감기는 눈을 힘없이 뜨며 아들, 딸, 사위, 자손들과 친척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리고 큰 아들 서종의 손을 앙상한 손으로 잡았다. 이윽고 이제현은 눈을 감은 채 숨결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내 일찍이 조정에 출사해서 ‘널리 베풀어 뭇 사람을 구제한다(博施濟衆 박시제중)’는 뜻을 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마음만 바쁘게 보냈을 뿐 이뤄놓은 것이 없다. 내가 세상을 위해서 한 일 보다는 받은 것이 더 많구나. 이것은 다 내 덕이 부족한 까닭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렇게 장성하니 나는 그것이 고마울 뿐이다.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 지워지기 쉽고, 달빛에 비낀 꽃그림자도 사라지기 쉽다. 너희들은 부와 권력을 함께 얻으려 하지 마라.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止不殆 지지불태)’는 노자의 가르침을 따라 천명에 순응하는 삶을 영위해주기 바란다.”

이렇게 마지막 유언을 마친 이제현은 큰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 달 전 최영이 ‘따뜻한 술 한 잔 올릴 수 있게 만수무강해 달라’는 염원을 들어주지 못하고 파란으로 점철된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큰 아들 이서종은 이제현의 공단 이불을 붙잡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그의 뺨을 적셨다.

“아버님, 크으흐흐, 이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요!”

임종을 함께 한 서씨 부인과 혜월이, 지장사에서 달려온 자혜스님, 그리고 안보, 백문보, 김구용, 이색, 정몽주를 비롯한 문생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통곡을 했다.

“대감, 대감이 먼저 가시면 우리는 누굴 믿고 살란 말입니까!”

“선생님, 의지할 곳 없는 저희들은 어디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현이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 개경의 하늘에서는 유성이 떨어졌으며, 지진이 일어나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산하를 뒤흔들었다. 백성들은 그 무서운 광경을 목도하며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이윽고 이제현이 영면(永眠)했다는 소식이 개경 장안에 퍼지자 백성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양 땅을 치며 슬퍼했다. 호곡(號哭) 소리는 그치지 않았으며 애간장이 끊어지는 단장(斷腸)의 오열은 계속되었다. 지긋지긋한 원간섭기에 붓 한 자루로 고려 말을 지켜냈던 명재상이 세상을 떠났음에랴.

익재 이제현!

그는 향년 81세로 사랑하는 가족과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했다. 그는 인생의 오복(五福) 중 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누렸던 것이다. 임금도 장상(將相)도 한번은 죽어야 한다. 생애가 아무리 위대하고 화려하다고 할지라도 죽음에 이르러서는 아쉬운 한을 남기게 되지만, 이제현의 죽음은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임종을 지켜보던 자혜 스님이 이제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들을 위로했다.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시중 어른의 열반(涅槃) 또한 그 하나 속으로 되돌아간 것과 진배없습니다. 어른께서는 이승에서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으시고 저승에서 편히 쉬실 것입니다. 다시 극락왕생(極樂往生)하실 것입니다…….

자혜 스님을 비롯한 개경의 여러 스님들은 반야심경, 금강경, 지장경을 독송하며 이제현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가깝고 먼 곳의 구분 없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천하에 명망을 떨친 고려의 큰 인물의 죽음을 문상했으며, 개경 주변의 여러 사찰에서는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제가 일제히 올려졌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해동(海東)의 석학이었고 대정치가였던 이제현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공민왕은 너무나 슬퍼서 한동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뒤 교지를 내렸다.

“사흘 동안 애도의 뜻으로 모든 여흥과 연회를 금한다.”

“익재 시중을 기리기 위해 개경 근처에 사찰을 건립하도록 하라.”

공민왕은 자신을 도와 국권회복을 주도한 이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왕으로서, 사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먼저 자신의 정권 후반기에 장인과 소원하게 지냈던 것을 후회하며 이제현의 장례식을 후하게 치러줬다. 그리고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계림부원군을 추서했다. 이제현은 개경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에 묻혔으며, 1376년 10월에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유배지에서 스승의 부음을 들은 최영은 삼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 그는 이제현이 타계하고 난 뒤 4년 후에 신돈이 처형되자 곧 찬성사로 복권된다.

고려의 대표 문인 이색은 이제현의 묘지명을 썼다. 그는 길이 668㎝, 너비 63.2㎝두께 20.5㎝의 검푸른 청석(靑石)판 비에 자신이 이제현의 문인임을 밝히고,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최고봉이다’라고 새겼다.

천지가 정기(精氣)를 쌓아 공은 이에 빼어나게 탄생하셨네.
규벽(奎璧, 구슬)이 빛나듯이 공은 이에 재주를 떨치셨네.
명망이 천하에 넘쳐 몸은 해동(海東)에 사셨지만
도덕의 우두머리요 문장의 종주(宗主)였다네.
북두칠성과 태산 같으신 창려(昌黎, 한유의 호) 한유(韓愈)처럼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 같으신 용릉(陵, 지명)의 주돈이(周敦)처럼
네 번 정승을 역임하여 나이 여든이 넘으셨는데
기린과 봉황처럼 그는 상서롭고
시초점(蓍草占, 톱풀을 이용하여 치는 점)과 거북점 같이 그는 신비로웠네.
공이 사직에 계시면서 생민(生民, 백성)에게는 은택이 있으니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配享, 공신의 신주를 모심)되어
그 영화로움 짝할 만한 이 없네.
오직 너희 자손들아
충효가 준법이니 알 리 없다 말하지 말라.
공이 구원(九原, 저승)에 계시니.
(大尾)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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