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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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당시 우리나라 국내 사정이 조금 시끄러웠다”
“진실은 전두환 대통령만이 알 것이다”

▲ 프로젝트는 주로 인프라 관계인데, 상수도사업 4억2000만 달러, 하수도사업 2억7000만 달러, 도로사업 5억7000만 달러, 다목적댐과 홍수 대책으로서 2억2000만 달러, 교육시설 확충을 위해서 6억 달러, 의료시설 확충을 위해서 2억 달러, 공해방지시설로서 1억2000만 달러, 부산지하철에 2억 달러가 들어 있다. 그다음에 경인지구 LNG 공급망 3억 달러, 지금 우리가 혜택을 보고 있다. 철도시설 현대화에 2억 달러, 주택건설에 4억 달러, 상품차관으로 25억 달러를 요청했다. 상당히 예외적이다. 그래서 총 60억 달러의 ODA 차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일본이 “상수도·하수도·도로사업 ODA는 납득이 간다. 다목적댐과 홍수 대책에 대해서는 ODA와 수은자금을 합치고, 시중은행도 자금을 합칠 생각을 하겠다. 교육시설과 의료시설 확충에 대한 ODA도 수긍한다. 그러나 공해방지는 ODA와 수은자금을 합친 방식, 부산지하철은 수은자금에서 하라”는 코멘트를 했다. 그리고 경인지구 LNG 공급망, 철도시설 현대화도 수은자금으로 하고 또 시중은행 일부 자금과 주택건설은 시중은행, ODA로 지금까지 주택건설을 제공한 예가 없다는 이야기다. 상품차관에 대해서는 극도의 저개발국에 한해서 예외적으로 제공하는데, 한국에 제공하게 되면 저개발국에 대해서도 공여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대단히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수익성이 높은 지하철, 철도차량, 경인 LNG 프로젝트 등에서도 ODA는 곤란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예비 절충 협의를 하고 나서 4월에 와서 마에다 도시카즈 대사가 스노베 대사 후임으로 당시 주한 일본대사로 왔다. 마에다 대사가 노신영 외무부장관을 찾아가서, 일본은 첫째 기본방침에 이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제협력을 제공하겠다는 원칙을 이야기하고, 60억 달러의 ODA는 3분의 2선에서, 이자율은 6~7% 선에서 고려를 하고 있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문제로 한국 측에서 총리, 부총리, 외무부장관 등 관계각료들이 내부 검토회의를 했는데 “일본이 제시한 40억 달러는 전액이 ODA가 돼야 한다. 아닐 경우에는 거부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때 저도 회의에 갔을 텐데, 당시 담당 과장인 이재춘 대사가 남긴 글에 따르면 고성들이 오갔다고 한다. 그때 특히 신병현 부총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니, 대통령 앞에서 이야기하지 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내부에서 옥신각신 이견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일본 측의 복안이 우리 측에 전달되면서부터, 일본 측에서는 1982년 4월 하순쯤에 세지마씨가 권익현 의원에게 전화를 해서 다케시다 노보루 의원을 특사로 보낼 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면담해서 직접 담판 짓겠다는 뜻이다. 우리 측은 그건 곤란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일본 측에서, 단순한 예방이라면 스노베 차관이나 야나기야 겐스케 외무심의관을 파견해서 외교채널에서 협의하겠다고 한다. 이때 대통령의 면담이 가능하면, 거기서 담판 짓겠다는 일본의 저의가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오기 전에 충분히 사전에 외무부장관, 총리 등을 거쳐서 왔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외교채널에서 계속 하겠다고 했다.
일본 측은 스노베나 야나기야를 보내겠다고 하다가 결국 4월 29일에 야나기야 외무심의관을 보낸다. 야나기야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하기 직전까지 동북아과 수석사무관이었다. 마에다 대사가 과장일 때 그 밑에 수석사무관이어서 한국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당시 야나기야는 ODA 13억 달러, 수은자금 22억 달러, 민간자금 5억 달러 안을 제시한다. ODA는 13억에 멈추는 거다. 결국 일본 측이 제시했던 ODA 기본 틀 안에서 움직이는 거다. 소노다 외상이 회상회담, 11차 정기각료회의에서 제시한 그 액수 범위 내인거다. 그래서 결국은 이때 야나기야 겐스케 심의관이 노신영 장관과 3번에 걸쳐서 협의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이때 우리 측 안이 “그렇다면 ODA는 30억 달러다”라고 했다. 평균금리에 대해서는 야나기야가 가져온 일본 측 안에서는 6.1%로 하자 했는데 우리는 “4%로 하자”고 했다. 그다음에 “공여 조건은 제너럴 언타이드이고 상환 기간은 ODA에 준한다. 상품차관은 필히 제공해달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5월 중에 사쿠라우치 외상에게 방한해달라고 우리 측이 요구를 한다.
그러나 일본 측은 야나기야가 안을 던지고 간 후에는 한참 사태의 진전을 관망하는 태도로 나왔다. 당시 우리나라 국내 사정이 조금 시끄러웠다.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이 났고, 당시 청와대도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돌 때였다. 또 경찰관 총기사건도 있어서 시끄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외무부장관이 교체된다. 노신영 장관이 안기부장으로 가고, 대신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이범석 장관이 새로운 장관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6월 2일 노신영 외무부장관이 경질됐는데, 6월 3일 세지마씨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범석 외무부장관과 접촉을 한다. 그리고 대통령과 권익현 씨하고도 접촉을 했다.

- 노신영 장관이 교체된 이유는 역시 강경론자라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대일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지도자의 판단인가.

▲ 사실은 잘 모르겠다. 노신영 장관이 청와대에 다녀오더니 저를 불러서는 “공 차관보, 나보고 안기부장을 하래”라고 했다. 외무부장관이 안기부장으로 간다는 건 상상도 못할 땐데 말이다. 또 풍설이 있었다든가 하면 풍설대로 됐구나 하는데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일본 오구라 가즈오는 “강경론자였기 때문에 역시 한국 내에서도 선수교체를 한번 시켜보자. 그래서 좀 더 부드럽게 보이는 이범석 장관을 앞세우자”는 생각이었다고 추측했다. 진신을 전두환 대통령만이 알 수 있는 사항이다.
이때 우리가 세지마씨를 통해서 특히 상품차관이 국내자금 조달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다음에 6월 20일 우리가 마에다 대사를 초치한다. 그래서 “40억 달러를 수락하겠다. 금리 6.1%는 일본이 이야기한 대로 좋다. 상품차관의 총액은 17억 달러로 하자. 수은자금도 무방하다. 나머지는 전부 ODA로 해달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최경록 주일대사에게 친서를 보내서 7월 말까지 타결하도록 현지에서 분발해달라고 했다. 9월 이전에 타결할 것을 염두에 두고 7월이라는 시한을 현지 대사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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