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고난의 역사를 온 몸으로 헤쳐나간 충신을 기리며

1910년 8월 29일로부터 35년간은 역사상 우리 민족이 가장 처절하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던 세월이었다. 서양 제국주의의 서세동점(西勢東漸) 움직임이 소용돌이치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개화를 통해 국제정세를 판단하고 제국(帝國)의 책략을 세우는데 미약하여 망국의 슬픔을 당하고 말았다.

중국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가장 크고 오래된 상시변수(常侍變數)이다. 멀리는 2천 1백년 전인 B.C. 108년 고조선 멸망 때부터 그랬고 가까이로는 임오군란과 6·25 때도 그랬다.

그 중국이 지금 개혁·개방 30년간 빠르게 발전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미국과 세계 질서를 각축하는 ‘글로벌 2’(Global 2)의 위치에 올라섰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사태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북한을 끌어안고 가겠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놓고 이해(利害)를 다투는 일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중국-북한 관계의 기본틀’을 향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예의주시해야 하며, 한 세기 전 보다 더 국제정세에 대한 현명하고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한다.

필자가 이 역사소설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100년 전의 치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해 일제강점기를 제외하고는 가장 외세의 간섭이 심했던 ‘원간섭기’ 97년간을 조명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익재 이제현.

그는 80평생을 원나라의 고려 지배라는 미증유의 민족수난기를 살면서 고난의 역사를 온 몸으로 헤쳐나간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가 40여 년간의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강화도로부터 출륙환도(出陸還都)하여 원나라에 예속된 지 17년 후인 1287년(충렬왕 13)에 태어났다. 그의 일생은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에 대한 원의 내정간섭과 그에 따른 인종(忍從)과 굴욕의 시대와 때를 같이 했다. 그는 7대왕(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네 번이나 재상을 지낸 경륜의 정치인이자, 춘추필법으로 필봉(筆鋒)을 마음껏 휘둘렀던 위대한 문호이다.

이제현은 기울어져 가는 고려 사직을 바로 세우기 위해 문필과 외교로 원나라 조정을 움직였으며, 고려의 자존과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몸을 바쳤다. 이순신 장군이 칼로 조선을 지켰다면, 이제현은 붓으로 고려를 지킨 것이다. 이제현은 ‘조선 3천년의 대가(大家)’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역대의 수많은 시화집에 거론되었다.

‘원간섭기’의 고려의 왕들은 정치적으로 입지가 매우 좁아 불행한 군주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원나라와 그런대로 균형을 이루며 고려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제현 같은 명재상의 공이라 할만하다.

원나라 부마국 97년을 함께 산 이제현.

나라가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그는 고려 백성들의 사표(師表)였다. 이제현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미리 막지 못한 환란 부끄럽도다. 나라 운명 붙드느라 머리만 세었어라”고 <황토점>에서 노래했듯이, 고려사를 논할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이제현은 신돈의 권력이 절정에 달하고 원이 망하기 1년 전인 1367년(공민왕 16),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려의 대표 문인 이색은 이제현의 묘비에 ‘몸은 해동(海東)에 있으나, 이름은 세계에 넘치며, 도덕의 으뜸이요 문장의 조종’이라고 새겼고, 조선의 최고 재상 류성룡도 ‘이제현은 덕(德), 공(功), 언(言)의 3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고려 5백 년 동안의 유일한 유가적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이제현은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백이정에게 배우고 권부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냈으며,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유·불·선을 융합하여 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했다.

이제현이 일생 동안 꿈꿔왔던 개혁은 고려 말에 전제개혁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가 꽃피웠던 성리학은 조선의 국가 통치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제자 이색이 정몽주를 배출한 뒤를 이어 권근·김종직·변계량 등을 거쳐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이제현이 쓴 책들 중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용패설》 4권, 습유(拾遺, 빠진 글을 보충한 것) 1권이 있으며, 이것을 합쳐서 흔히 《익재집》이라 한다. 1962년에 국보 제110호로 지정된 이제현의 영정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대 원나라 최고의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렸으며, 그 당시 가장 존경받던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산천 정기를 타고나서 유학에 달통하며, 충성을 마음에 두고 정사를 공정히 한다’고 찬(讚)을 썼다.

그의 무덤이 있는 개성은 지금 ‘개성공단’의 조성과 활동으로 새로운 한민족사 융합의 기초로 다져지고 있다. 아마도 익재 대감의 애족애민의 살뜰한 정이 현현(顯現)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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