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에서 사무실로 돌아가려면 대개 차를 타고 가지만 수원과 영준은 걸어서 갔다. 함께 걸어가자는 영준의 제안을 수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한 차장님은 핵폭탄 제조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나요?”
영준이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수원은 영준을 돌아보았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지난번에 한 말 때문에 묻는 거예요?”
수원은 ‘폐연료봉 빼내서 핵폭탄 만들러 한국수력원자력에 왔다’고 했던 농담이 생각났다.
“그건 아니고요.”

영준이 심각한 얼굴을 풀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가령, 우리 회사에서 맘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핵폭탄을 만들 연료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연료에는 4퍼센트 정도의 농축 펠렛이 있을 뿐이잖아요. 폐연료봉에도 플루토늄 238은 1퍼센트 정도인데 핵폭탄을 만들려면 95퍼센트 이상이 필요하고요. 더구나 우리나라는 핵 농축이나 핵 재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국제 사회에 선언했잖아요.”
수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맘먹기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북한이 핵무기를 만든 판국에 국제적 체면이나 지키고 있다는 건...”
한담을 나눌 때 연구원들끼리 간혹 이런 말을 주고받곤 했다. 그러나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질 때면 단골 안주처럼 나오는 얘기일 뿐이었다. 영준처럼 정색을 하고 묻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주 차장님 생각은 그러면?”
수원이 묻자 영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발만 바라보며 걸었다.

“안토니오라는 사람 말이에요.”
수원이 먼저 말문을 다시 열었다.
“범죄 조직에 연루된 사람 아닐까요? 일본의 야쿠자 같은...”
“글쎄요. 야쿠자라...”

영준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우리 안토니오 낚시 가게에 한번 가볼까요?”
수원이 뜻밖의 제의를 하자 영준은 우뚝 멈추어 섰다.
“예? 우리가 말입니까?”
“왜 싫으세요? 본부장님께서도 경찰과 별도로 회사에서도 조사를 하라고 지시하셨잖아요.”

“그럼 가보죠.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토요일 오후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한 주일이 끝난 토요일 오후, 퇴근을 위해 책상을 정리하는데 고유미가 전화를 걸어왔다.

“하이, 수원.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협조 좀 해 줄래?”
유미가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봐. 시간과 돈만 많이 안 든다면 들어줄게.”
“돈은 필요 없고 시간만 조금 내면 돼.”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다음 달 우리 잡지에 핵 문제에 관한 특집을 꾸미거든. 그래서 말인데, 너하고 정세찬 교수하고 대담을 한번 했으면 해. ‘핵 주권과 국제 역학’을 주제로. 장소는 고리 원전 건설 현장. 그러면 그림이 멋지게 나올 것 같아.”

“그건 좀 곤란하겠는걸. 난 핵 연구원이잖아. 핵 주권이니 뭐니 하는 정치적인 문제는 잘 몰라.”
수원이 딱 잘라 말하자 유미는 금세 물러섰다.

“아이고 알았네요, 고매하신 연구원님. 에이, 대담자를 바꿔야겠네.”
이른 봄이라서 그런지 동백꽃이 탐스럽게 웃음을 던졌다.
“한 차장님은 꽃이 좋으십니까?”

영준이 굽은 길을 능숙하게 운전하면서 물었다. 핸들을 꽉 잡은 채 앞만 보면서도 수원이 동백꽃에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꽃보다 남자...”

수원의 대답에 영준의 근엄한 표정이 잠시 풀렸다.
지프가 달맞이고개를 넘어서자 멀리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졌다. 안토니오 낚시점은 찾기 쉬운 곳에 있었다.

영준은 모퉁이 공터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가게에는 두터운 철문이 내려져 있었다. 건물을 다 둘러보았으나 문이 열린 데가 없었다.
“주인이 죽었는데 쉽게 문을 열겠습니까?”
영준이 실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그렇군요. 그럼 잠깐 바닷가나 거닐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볼까요?
수원과 영준은 방파제를 넘어 조그만 배 여러 척이 정박해 있는 곳으로 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은빛 나뭇잎을 무한히 깔아놓은 듯이 보였다.
“아니, 저건?”

수원이 쇠줄에 묶여 있는 작은 요트 한 척을 가리켰다.

- 안토니오 2.

푸른색 바탕에 흰 페인트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영준이 벌떡 일어나서 배 쪽으로 달려갔다. 수원도 황급히 뒤따라갔다.
배는 아무나 올라갈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배 위에 올랐다. 갑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선실로 들어갔다. 비좁은 선실에는 마시고 난 맥주병 몇 개와 어망 두어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테이블 다리 옆에 검은 비닐 봉투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언뜻 보아 쓰레기봉투 같았다.

수원은 검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핸드폰처럼 생긴 물건이 들어 있었다.
수원은 영준이 안 보는 사이에 슬쩍 핸드백에 집어 넣었다.
‘고지식한 주 차장이라면 바로 수사팀에 갖다 주자고 할 테지?’
수원은 자신이 먼저 살펴본 다음 넘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몇 번이고 여기를 수색했을 텐데 이걸 발견하지 못한 걸까?’
수사팀이 왔다면 이 물건을 그대로 남겨 뒀을 리가 없었다.
‘아님 경찰 수사가 끝난 뒤 누군가가 떨어뜨린 걸까?’
수원은 이런 저런 가능성을 추측해 보았다.

“이 배를 이용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낚시를 가장해서 발전소 인근까지 접근한 다음 잠수했을 겁니다. 함께 이 배를 탔던 사람은 안토니오가 시체로 떠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고요.”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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