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주말 아침이었다. 이제 갓 걷기 시작한 딸과 아파트 단지에 산책을 나갔다. 걷다 서다 달리다 안아 달라 매달리는 딸과 보내는 아침 시간은 충만했다. 5월답게 바람도 따뜻하고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삼십여 분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안 식구들이 다들 선 채로 거실 TV를 보고 있었다. 아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딸을 안아들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선배, 노무현이 죽었대. 자살했대.” 

그 날 나와 내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은 툭툭 끊겨서 재생된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은 아니고, 애초에 기억 자체가 불완전한 편이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한참을 TV뉴스를 보다가 몇몇 사람들과 전화통화를 하더니 집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누군가를 만났다는데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 다음 날에야 집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지금도 떠오르는 유일한 기억은 노무현을 보내는 시청 앞 노제에서 어린 딸과 눈물바람인 아내와 함께 있었다는 것. 그렇게 노무현을 보냈다.

노무현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 2002년 12월18일 대선 전야, 신림사거리 마지막 유세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무현을 보았지만 그가 있는 연단은 너무 멀었다. 실루엣뿐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만나고 악수하고 포옹이라도 한 번 하고 우렁우렁한 말 한마디라도 들었다면 나의 오월은 지금보다 더 힘겨웠으리라.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그의 퇴임 이후에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을 한 번은 봤어야 했다. 한 해 두 해 미루다 이제 봉하마을은 영영 못 가는 곳이 되어 버렸다.

아내는 노무현이 잠든 묘역에 박석 하나 놓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한다. 변변한 직업도 없던 시절이라 박석 하나 놓을 돈이 아쉬워 잠시 망설이는 중에 박석 모금이 끝나 버렸다. 내 가난과 게으름에 화가 났지만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삶의 무게에 지친 내게는 노무현이 사랑했던 깨어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일로 다가왔다. 이후 정치권에서 직업을 찾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십여 년 이라는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노무현이란 이름을 숨어서 부르지 않아도 되는 처지가 되었다.

노무현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올 해로 11년이 된다. 어제 일이 오늘 일에 지워지는 시대에 노무현에게는 보수우파의 우상인 박정희나 민주개혁 세력의 위인인 김대중보다 더 큰 사랑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사랑의 원천은 노무현이란 사람의 소탈함 속에 감춰졌던 거인의 풍모를 비로소 발견하는 놀라움이 자리 잡고 있다. 당장 코로나19 감염병과 분투 중인 우리에게 질병관리본부라는 최종병기가 없었다면 어땠겠나 생각하면 아찔할 뿐이다. 

질병관리본부뿐이랴. 노무현은 안보의 개념을 위기관리 차원으로 확장하며 청와대에 NSC와 위기관리센터를 만들었고, 방만한 국가재정의 혁신을 위해 국가재정법을 제정했다. 노무현은 사후에도 자신이 설계한 국가 운영의 틀을 통해 ‘노무현 없는 노무현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서거한 지 11주년이 되었음에도 노무현을 향한 그리움이 옅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떠난 그날의 아침이 유난히 화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무현은 우리 세대의 오월이다. 시작이고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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