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진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은 5월의 화창한 아침이었다. 발견한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친구 하예란이었다.
“어제는 들어오지 않았다고요?”

강 형사가 볼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예.”
예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볼펜 끝에서 비듬이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강 형사는 여전히 흥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유진이한테 일이 있었지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갑자기 강 형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예란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촌스럽게 생겨서 엉큼하기는.
“남자 친구가 오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맘껏 즐기라고 자리를 비우셨다?”

강 형사는 속이 니글거리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새파랗게 젊은것들이 연립주택을 빌려서 산다 했더니…….“그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누구지요?”
예란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모른단 말입니까, 한방을 쓰면서?”

“한방을 쓰면 상대방의 모든 걸 알아야 하나요? 우리는 편의를 위해서 서로 돈을 내고 함께 잘 방을 만든 것뿐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강 형사는 좀 더 잔인한 질문을 던져 보고 싶었다.
“그래요? 남자가 워낙 많아서 기억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뭐예요?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래요!”
예란은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섰다. “흥분하지 말고 앉아요. 아니면 그만이지 화낼 건 뭐람.”

강 형사의 능글맞은 말에 예란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주저앉았다.
“두 사람의 직업은 뭐지요?” “나는 모델이요. 유진이는 뭐 하는지 몰라요.”
“도대체 아는 게 없군. 둘이 같이 산 지는 얼마나 되지요?”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이니까 거진 반년이 되었네요.”
“반년씩 살고도 룸메이트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모를 수도 있지요. 우리는 둘 다 별로 말이 많지 않아요. 또 일하고 돌아오면 피곤하니까 일찍 자고….”

예란의 자세는 한결같이 당당했다. “그럼 뭐 연락처 따위도 아는 게 없겠구먼.”
“그런 건 모르지만, 유진이 쓰던 수첩이 있으니까 웬만한 건 거기 적혀 있을 거예요.”

“음, 그렇겠군. 어제 다녀간 남자도 말이지?”
예란은 강 형사의 말 속에 들어 있는 뼈를 느끼고 눈을 흘겼다.
“별 특기할 만한 점이 없는 사건입니다.”

강 형사는 사건 조사 기록을 추 경감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간은 11시30분에서 1시30분 사이로 추정됩니다. 마지막으로 피살자를 본 사람은 같은 방의 하예란인데 9시에 헤어졌답니다.

살해당하기 전이나 살해당한 후에도 섹스를 한 흔적은 없습니다. 사인은 질식으로 흉기는 평소 두르고 다니던 스카프입니다만, 잠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스카프는 누군가가 꺼낸 것이겠지요. 이 점에서 범인은 확실히 안면이 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피살자의 직업은 컴퓨터 오퍼레이터인데 직장 생활이 원만했고 사내 연애라든가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순결한 처녀였다고 직장 동료들은 말하는데, 그런 점에서 같은 방 동료인 하예란과의 의견이 상치됩니다. 하예란과는 5개월간 동거를 했는데 본인은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스스로 모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니는 모델 학원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직 걸음걸이를 교정하지 못해서 직업 모델로 활동하지는 못하고 있답니다.”

추 경감은 눈을 반쯤 감고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강 형사가 졸고 있는 상사 앞에서 혼자 쇼를 하고 잇는 것만 같았다.
“단서는 하나도 없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날 밤 11시부터 비가 내렸고 그 연립주택은 하수도 공사를 하느라 마당이 온통 뒤집혀 있었습니다.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되었던 거지요. 그런데 발자국이 피살자의 방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여자 하이힐인데 팔자걸음으로 되어 있더군요. 이것이 그 사진입니다.”
“좋은 단서로군. 발 크기는 측정해 보았나?”

“예, 그뿐만 아니라 국과수에 의뢰해서 용의자의 체격과 키도 추정지를 내었습니다.”

추 경감이 눈을 떴다. “그래? 그럼 용의자가 나타났겠군?”
강 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자신이 있을 때 하는 동작이다.
“하예란과 너무 흡사하더군요” “동기는 찾았나?”
추 경감이 강 형사가 장황하게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기세를 느끼고 앞질러 말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예란에게는 알리바이가 있는 게 문젭니다.”
강 형사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유심히 관찰했는데 전혀 팔자걸음을 걷지 않더라고요. 그 발자국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데 말입니다.”

“원래 극도로 긴장하면 억눌렸던 본능이 되살아나는 법이야. 그 여자, 직업 모델을 못하는 이유가 분명 그 때문일 거야.”
추 경감이 담배를 하나 물며 느긋하게 말했다.
“내가 증명해 줄 테니 그 여자의 낡은 하이힐이나 하나 구해 와.”
“예?”

강 형사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퀴즈. 추 경감은 하이힐에서 뭘 알아내려 하는 것일까요?

 

[답변- 2단] 추 경감이 하이힐을 들고 말했다.
“강 형사, 보라고. 팔자걸음을 걸으면 하이힐이 바깥쪽으로 닳는다고. 이제 범인이 누군지 알겠나?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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