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25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시청하고 있다. 2020.05.25. [뉴시스]
시민들이 25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시청하고 있다. 2020.05.25. [뉴시스]

 

[일요서울ㅣ조주형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부금 사용처 유용·횡령 의혹'에 휩싸인 윤미향 당선인, 그가 대표로 있던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대해 이용수(92) 할머니가 25일 오후 2시 40분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2차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할머니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윤 당선인을 비롯한 정의연에 대해 비판했다. 윤 당선인은 이날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앞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2)는 지난 7일 "정의연 후원금이 불투명하게 사용되고 있다"며 "30여년 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 집회 때 돈없는 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내지만 제가 벽시계 하나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않았다"고 폭로하면서 여론의 도마위에 올랐다.

그러자 윤 당선인이 대표로 있던 정의기억연대는 지난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인권재단 사람' 2층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사용이 불투명하다는 논란에 대해 사과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정작 기부금 세부 내역에 대해선 공개할 수 없다는 의견도 내놔 공분을 샀다.

 
한편 다음은 이 할머니의 2차 기자회견 전문이다.
 
시민들이 25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시청하고 있다. 2020.05.25. [뉴시스]
시민들이 25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시청하고 있다. 2020.05.25. [뉴시스]

 

〈이용수 할머니 2차 기자회견 전문〉

이걸 전부 카메라로 찍었으면 좋겠어.(관계자 : 저희가 파일로 돌리면 됩니다) 제가 두 번째 기자회견을 합니다.

누굴 원망하고 잘못했다고 하는 건 제가 처음 기자회견할 떄 했고 한데, 많이 생각지 못하는 것이 나왔어.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검찰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정신대 대책 협의회.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이야. 그런데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들. 정신대가 할 수 있어.

하지만 공장 갔다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달라. 공장 갔다온 할머니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했지만 위안부 할머니는 간 데가 다 달라.


잠깐 제가 간 데를 말씀드릴게.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16살. 만으로 하면 14살이야. 저는 양력으로 돼가 있어. 그때 성을 갈지 않으면 배급을 안줬어. 성을 갈아서 야스하라 라고 갈았어.

그런데 학교도 그때는 일본 학교야. 제가 3,4학년까지 다녔어. 가타카나를 알았어. 끌려가서도 대만 xx 카미카제 특공 부대로 끌려가서도 그 장교가 가타카나로 써줘서 대화를 했어. 이 군인이 하는 이야기도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했어. 그러면 제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히가이샤. 라고 적은 걸 배웠어. 이 군인이 이름을 지어줬어.

야스하라 도시코 라고 지어주면서. 나도 도시코 같은 피해자라는 것을. 히가이샤라는 것을 적어줬. 히가이샤가 뭔고. 몰랐어. 그 후에 겪으면서 제가 생ㄱ가할 떄 끌려가서 당한 건 말로는 못해. 제가 쭉 30년 동안 해오면서 미국 떠돌아다니면서 증언을 했어.

그러면 제가 확실하고 바른말 하고 이러니까 정신대대책협의회라는 데를 몰랐어. 그런데 제가 92년도 6월 25일날 신고를 할 적에 윤미향이라는 간사였어. 간사한테 했어.


25일날 했는데 29일날 모임이 있다고 오라고 해서 갔어. 어느 교횝디다. 교회에 갔었는데 그날 따라 일본 어느 선생님이 정년퇴직을 하고 돈을 천엔인가? 줬다고 하면서 백만원씩 나눠줬어. 그게 무슨 돈인지도 몰랐어.

그때부터 모금을 하는 걸 저는 봤어. 왜 모금을 하는지. 그것도 몰랐어. 따라다니면서 모금을 하는데 보니까 농구선수들이 농구를 하는데 기다렸어. 기다렸는데 기대를 가지고 그 농구선수가 돈을 들고 모금을 하더라고요. 그 돈을 받아오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그게 왜 그런지 몰랐어. 그런가보다 했는데도 좀 부끄러웠어. 저렇게 하면서 애를 쓰고 이기려고 하는데 거기 버젓이 앉아서 그 농구 끝나고 하면 돈을. 받아서 나왔어. 좀 늦었어. 늦게인데. 배가 고픈데 좀 맛있는거 사두고. 하니까 돈 없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뭐 그런가보다 생각했어. 어디 가도, 또 교회 가도 또 돈을 주면 그거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모르고 쭉 30년을 해가지고 나왔어. 그런데 무엇입니까.


정신대 대책협의회입니다. 그러면 공장 갖다온 할머니들로 해야하는데 말하자면 빵으로 말하자면 공장 갖다온 할머니들 밀가루로 반죽해서 빚어놓고 속으로는 맛있고 귀하고.

그러면 그 속은 위안부야. 그걸 해도 쭉 30년을 해와도 저는 그걸 몰랐어. 그저께 그그저께도 몰랐어. 어저께 저녁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은 왜. 뭣땜에. 정신대 할머니와 함꼐하는 시민 모임이 위안부 생명을 걸어놓고 끌려놓고 간 위안부를 왜 즈그가 정신대 할머니랑 합해가지고 쭉 이용해나왔습니다.


저는 그것도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저께 제가 생각하니. 이럴 수가 있나. 30년 동안 앉아가지고 얘기하는게 사죄해라 배상해라. 하는데 일본 사람이 뭔줄 알아야 사죄하고 배상하지. 섞어가지고 사죄안해도 된다는거 아닙니까.

이걸 30년동안 하면서 사죄배상 요구하고 학생들까지 그 고생을 시켰어. 그 학생들 돼지저금통 털어 나오는 돈도 받아 챙겼어. 이래서 저 어제 한숨도 못잤어. 왜 뭣떔으로 정신대대책협의회만 정신대 문제만 하지 왜 즈그가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사용했어.

이것을 생각하니 저는 자다 일어나서 펑펑 울었어. 왜 내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왜 여태까지 말도 못했나. 하는 걸 생각하니 그래. 내일 기자회견에는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겠다. 저희가 사죄배상 요구하는 것을 막았잖아. 위안부하고 정신대하고 어떻게 같습니까. 위안부는 생명을 걸어놓고 거기 가서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데. 이런걸 30년을 이용해나왔어. 저는 결심했습니다. 내일 기자회견 할 때는 이것을 내가 반드시 밝혀야되겠다. 이분이. 그 사람들이 바봅니까. 뭣하러 정신ㄴ대 대책협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하는데 거기에 해당치도 않았는데 뭣하러 그사람들이 사죄하고 배상하겠나. 안한 이유를 저는 알았어. 이것 또한 무엇인가. 사진 한장만 목에 걸고 했는데 이것은 할머니들로 위안부 할머니들로 팔아먹었어. 팔았습니다. 내가 왜 팔려야됩니까.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부모님들은 불면 날아날까. 엄마가 감춰서. 이리 온나. 해서 멕이고 했어. 이건 남의 집의 귀한 딸 고명딸을 밤에 그것도 끌고 가서 카미카제 부대를 가서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끌고가서 전기고문과 칼 가지고 몸을 그어서 죽여놨어.

그런데 군인이 보니까 급하게 들어가라고. 군인이 앉아있는데 안들어간다니까 오는데. 머리를 질질질 끌고 가서 광 아래 자물쇠. 문을 확 열더만 밀었어. 또 일으켜서 발로. 돌덩이보다 위험한 군화발이었어. 허리를 발길로 차서 엎어졌는데 너무너무 배 찢어지도록 아프고 죽도록 아프고. 저 잘못한 거 없습니다.

근데 잘못했다고 빌면서 살려달라고 했어. 그런데 앉혀가지고 두 팔을 놓고. 여기 하나 감고 여기 하나 감고 지금 머리에 귀에 소리납니다. 그때 제가 엄마를 한번 크게 불렀는데. 귀에서 나는지 머리에서 나는지. 이것은 어린 날에서부터 지금까지 지금도 나.


이래도 이걸 왜 그런지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어. 그런데 정신대대책협의회라고 하면 이걸 밝혀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할머니 어디갔다왔습니까. 해서 밝혀줬는데 한번도 할머니 앉혀가지고 증언 한번 받아본적이 없어. 밥먹는데도 어디갔다왔습니까. 하면 그걸 가지고 책을 냈어. 93년도부터 ㅡ에 집이 있었어.

책을 놓고 그 책을 6천500원에 파는 걸 봤어. 그래도 그걸 몰랐어. 그런 책이 있는줄 모르고 그것이 당연한갑다 하고 다니면서도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제가 제 일이라고 생각하고 증언도 하고 또 정신대 대책협의회 박물관을 짓는데 서대문형무소에서 짓는다고 했어.

그때에 박ㅡ씨하고 큰조카내외하고 저하고 가서 ㅡ를 받고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증언을 했어. 그 박물관 대표가 어데 있어. 대표란 소리 하지 마라. 창피하다. 고 했어. 그러면 대표 소리는 안해도 대표 대우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하지만 끝까지 3월 30일날 제가 전화를 했어.


미향씨. 이러면 안되지 않나. 한번 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기자회견할란다. 했는데 아주 큰소리로 당당하게 기자회견 하라고 해서 제가 5월 7일 기자회견 한 거야. 이런 등등을 하나하나 말씀을 못드리겠어. 빨리 생각이 안납니다. 이래서 제가 했다고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느날이야. 여기 와가 있을 거야.

소위 국회의원으로 나올적에 ㅡ제가 도와준 건 없지만 가보고 돼야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따구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나갔다가 들어오니까 들어와 있는데 문을 열어돌라고 해서 열어주니까 윤미향씨가 싹 들어오는 거에요. 놀래서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러면서 와서 무릎을 꿇고 무슨 말인지 용서? 뭐를 용서를 합니까.


뭘 가지고 와야. 뭘 가지고 와야 용서를 하든가말든가하지요. 용서? 뭐를? 보니까 엄청나더구나. 그걸 검찰에서도 할 것이고 내가 며칠 후에 기자회견을 할테니 그때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갔는데 나가보니까 소위 교수라카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 내가 말을 안했어.

뻔뻔시리 차에 내려서 휠체어 타려하니까 뭣이 어떻고. 도대체 뻔뻔시럽기 짝이 없어. 이런 사람이 윤미향이를 ㅡ했다고 해. 해서 윤미향이에게 내가 기자회견 할텡게 그때 오라고 하고 나갔는데 어데 있더라고. 있는데 거기에서 무슨 원수졌는 것도 아니고 30년을 지내왔어. 했는데 한번 안아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저는 생각에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안아주니 저도 인간입니다. 30년을 같이 했으니. 원수도 아니고.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기침) 눈물이 왈칵 나서 제가 울었는데. 이걸 가지고 기자님들.


좀 부탁드립니다. 명백하게. 좀 기사를 내주세요. 그걸 가지고 용서했다. 이런 기사. 너무 황당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거는 확실하고 명백히 여러분들도 다 책임이 돌아가는 일입니다. 제가 이거를 명백하게 하려고 했는데. 생각은 있었어. 어떻게 이걸 그만둬라. 하지마라 할 수가 없었어. 해서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 맘대로 뭐든지 하고싶으면 하고 팽개치는데 어떻게 30년 같이 해왔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맘대로 팽개쳤어.

우리 국민들. 세계 여러분들이 그 데모에 나오십니다. 그분들도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랬어. 이래놓고 자기가 사리사욕 챙겨서 맘대로 또 국회의원 비례대표도 나갔어. 저는 모릅니다. 저한테 얘기도 없었고 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거니까 제가 무엇을 용서를 구합니까.

용서? 그분도 자기 맘대로 했으니까 하든지 말든지 하는건데.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 뭣때문에 용서를 바랍니까. 그거 아니라도 여러 수십만가지를 제가 말씀을 다 못드립니다. 속이고 이용하고 ㅡ 30년동안 재주했어. 그 돈은 받아먹었어. 무슨 용서를 바랍니까.

저는 데모 방식을 바꾼다는거지 끝내는 건 아닙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고 또다시 새롭게 좀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이거를. 하기 위해서 제가 이거를 바꾼다고 했어. 그러면 먼저도 이 이야기를 했어.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야. 이 학생들이 결국은 그 나라 주인 아닌가. 하니까 이 학생들이 알아야 사죄 배상. 뭣때문에 사죄배상을 한다는 걸 알아야 할 거 아니야.

한국이 거짓말 한다. 그 학생들한테 물으면 한국이 거짓말쟁이다. 거짓말만 한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것도 몰라서 그런거 아닌가. 우리 학생들도 몰라서 그렇고. 한국이 거짓말만 하는 한국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거야. 일본과 한국을 학생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이것이 시간이 오래 갈 거야. 시간이 가도 이 학생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이 왜 일본한테 배상하고 사죄하라고 하나. 뭣때문에. 이런걸 얘기하면 그러면 일본은 왜 하지 않노. 하면 그게 아니라고 하고 거짓말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그 말 들었다. 한국이 거짓말만 한다. 그렇게 해놨지 않나.

그럼 이걸 학생들한테 가르쳐서 서로 왕래하면서 친해지면 속에 할 말도 있고. 또 배워야 해. 배워야 알지요. 그래서 제가 짧은 생각이지만 저로선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어. 제가 대구에 역사관이 있어. 이것 또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었어. 이걸 누가 했나. 대구 최ㅡ변호사가 대표로 있으면서 이걸 했어.

지금 윤미향을 밀고 있어. 윤을 밀고 있으면서 어느 아침에 할머니. 윤미향 욕하지 마세요. ㅡ일본에 돈 많이 내고 하니까. 그럼 나비기금이라든지 하는거 김복동할머니 돈입니까. 어느날 미국 가기로 했는데 모금하기로 했어. 모금을 6백만원인가 했는데 저한테 하는 말이 전화가 왔어. 이것 또한 말이 됩니까? 모금하라 했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30년 그것만 이야기했는데 줄줄줄 나오는게 엄청나게 나옵니다. 말도못하게 나옵디다. 할머니 팔아서 햇으니까. 왜 위안부 할머니를 즈그가 했습니까. 부정 아닙니까 이것도. 이것도 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무슨 사죕니까.

 
김복동 할머니요? 김복동 할머니는 한쪽눈 실명이야. 저보다 두살 윕니다. 실명이고 한쪽눈 조금 보이는 이 할머니를 끌고 댕겼지요. 미국으로 어디로 끌고 다니면서. 있을 때 잘하고 할머니 있을때 해야하는데 고생시키고 끌고다니면서 할머니 이용해먹고 그래놓고도 뻔뻔스럽게 여주에 가가지고 눈물을 흘려요? 그거는 가짜 눈물입니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이런. 그도 죄인데 죄를 모르고 아직까지. 그것은 다 검찰측에서 밝힐 겁니다. 하지만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위안부를 이용해서 한 것은 도저히 용서못합니다. 이것 또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해서 저는 끝까지 나이가 들다보니 자신이 없습니다. 한데, 우리 학생들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 일본과 한국과 학생들 해서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올바른 역사를 공부를 해서 위안부 문제 사회 배상. 이건 천년 만년이 지나도 반드시 일본이 해야 해.

이런걸 알게 하기 위해서 양국이 친하게 지내면서 역사를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명쓴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 해결해줄 사람은. 우리 학생들이라고 생각해. 왜 내가 증언을 다 해야하고. 늦게까지 살아 이게 죕니까.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다. 언니 동생들.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으니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랍니다. 그래서 그거를 생각하니까 너무 제가 미안하고 한데 저는 하나도 부끄럼이 없어.

이렇게 위안부야. 위안부. 위안부가. 여자야. 이것이 저는 세계 여성분들께 피해 끼칠 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세계 여성 여러분들 저희가 위안부지만 여성이라는 그 두글자가 너무 미안하고 해서 어떡하면 이런 것도 내가 좀 미안한 말씀 드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 기회로 모든 여성분들께 정말 미안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누명도 쓰실 것이고 여자이기 때문에 위안부를 여자다.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런 소리 들으실겁니다. 해서, 제가 한사람한사람에게 어떻게 다합니까.

이런 기자회견을 통해서 세계 여성분들에게 확실하게 위안부가 여러분들의 여자라는 두글자 손상 입혔다는게 참 죄송합니다. 하는 걸 말씀드립니다.

 
제가 어떻게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제가 교육을 확실히 두 나라가 서로 왕래하고 친하게 지내가지고 이 역사를 아셔가지고 이 억울한 위안부 문제를 사죄받고 배상해야 제가 사죄를 받아야 위안부 누명을 벗어. 제가 왜 위안부고 성노옙니까. 그 더러운 성노예 소리를 왜 합니까. 미국 들으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팔아서 뭘 했습니까.

저 안성이라는 것도 나오는데 쉼터 화려하게 지어놨습니다. 그래서 윤미향. 그 위대한 대표. 그 아버님이 사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런거 엄청나게 나왔는데 그것은 검찰청에서 다 밝힐 겁니다. 이 죄를 모르고 아직까지도 큰 소리 하고 있는 이 사람들 죄는 지은대로 가고 공은 ㅡ로 갑니다.

이 죄를 물어서 죄를 살려야 해. 살린다고 죄가. 마음이 풀리는 건 아니지만 고쳐야지. 이 후에 두번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돌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제가 또 무슨 말씀이 있겠습니까. 이걸 밝히기 위해서 하는데 너무 여러분들이 오셧는데 좌석이 너무 좁습디다. 그래서 제가 장소를 바꿨습니다.

기자 여러분들 부탁드립니다. 꼭 했던 말 그대로 해주세요. 없는 말 추측해가지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를 욕보이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다 옳은 말씀으로 기사를 내 주셨으면 두번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가 오늘 장소를 바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과 같이 앉아서 마지막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들도 너무 가슴아파 할 것이고 해서 제가 요즘 이야기를 했어. 여러분들이 그래 아시고. 저 요즘 정말 죽겠습니다.

너무 죽겠습니다. 또 코로나가 퍼졋다고 하는데 저는 걱정이 됏어요. 좁은데서 하면 안되겟다는 생각에. 그래서 여러분을 큰 데 모셧어. 그 점 양해하시고 꼭 기사는 있는 그대로 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