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수
장덕수

2017년 5월 중순 문재인 대통령 취임후 지난 21대 선거때 막말 파문을 일으켰던 정치인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서 가볍게 안부 인사를 하고 잠시 대화하다가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 중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 구절이 화제가 됐다. 

필자가 농담으로 "문 대통령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든다니 놀랄 일만 남았네"라고 하자 그는 정색을 하면서 "우리 대통령도 아닌데 놀랄 일이 뭐가 있어"라고 답했다. 깜짝 놀랐다. 예전에 똑같은 얘기를 듣고 놀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얼마 안 지나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민주당 출입 당시 가깝게 지냈던 보좌관 출신 몇 명과 저녁을 같이했다.

그중 동갑내기의 보좌관 출신 한 참석자의 말이 자꾸 신경을 거슬렸다. 필자와 또 다른 출입기자 출신에게 박근혜 대통령을 가리켜 거듭해서 '니네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다. 처음 한두 번은 실수이려니 하고 넘어가다가 계속되자 그냥 대통령이라고 하면 되지 왜 굳이 ‘니네 대통령’이라고 하는지 물었다. 그는 "내가 뽑은 대통령이 아니니 니네 대통령이지"라고 답했다. 

그의 '니네 대통령' 은 충격이었고 이후에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4년여가 지나서 다시 반대 진영의 인사로부터 다른 표현의 ‘니네 대통령’이란 소리를 들은 것이다. 끝날 것 같지 않은 편 가르기와 피해 의식, 이념 투쟁이 걱정스러웠다. 

정치 선진국을 보면 선거 때는 니편 내편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지만 일단 결과가 나오면 패배한 진용은 깨끗히 승복한다. 또 승자는 묵은 감정과 사익을 배제하고 미래지향적인 국정운영에 전념한다. 정치보복은 생각도 못한다. 국민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선거라며 승복할 수 없다고 떠들거나 '니네 대통령‘ ’우리 대통령' '보수와 진보' '니편 내편' 으로 갈라치며 분열과 보복을 계속하지 않는다. 

경제. 문화. 의료 등 세계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만이 유독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국가.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 권력을 유지, 확대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국가정체성 훼손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대승적 발전보다는 당파가 다르면 서로 사귀지도, 왕래하지도 않던 그래서 상대진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몰아 죽이고야 말았던 조선 사림의 붕당정치처럼 적대적 대결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 177석을 거머쥔 집권 여당인 민주당 소속 인사들이 보이는 행태를 보면 대한민국을 유지할 생각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과거 군사정권 당시 국가정체성, 국론 통합의 장애물은 반민주 반인권적 독재정치와 기득권 세력의 파렴치한 부정부패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정치보복과 내로남불식의 인사·사법 파행이다. 이전 정부에서는 인사청문회를 도저히 통과하지 못할 부적격한 인사들을 청문회 의결에 관계없이 대통령 직권으로 임명했다. 대통령 권한이란다. 측근 인사들의 명백한 부정불법에 대해서는 언론의 왜곡 과대 보도라고 치부한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회계부정 사건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유형의 회계부정 의혹이 제기됐다면 공당으로, 집권당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차원에서라도 사과하고 진상조사를 벌여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도리어 "신상 털기식 의혹 제기에 굴복해선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소속 의원이나 친여 NGO를 동원해 비리를 고발한 이용수 할머니를 '토착왜구' '치매' '친일세력 배후 조종' 등으로 조롱하고 있다. 

친일파 프레임으로 윤미향 파문을 잠재우고 싶은지 민주당 이수진 당선인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친일파를 현충원에서 파묘(破墓·무덤을 파냄)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대법원까지 유죄가 확정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 구하기에 나섰다. 객관적 증거조차 조작이고 왜곡이라고 한다. 거대 여당이 새로운 법과 관행, 정책,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힘으로, 다수 의석으로 뭉개는 것이 아니라 먼저 대화와 설득을 통해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지향, 국가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전무후무한 세계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야당이 패배를 인정하고 이성적인 협력과 견제를 할 수 있도록, '니네 대통령'이 아닌 '우리 대통령', '좌우 대한민국' 아니라 '우리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거대 여당이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국가정체성을 뒤흔드는 짓은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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