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말로 한 건 지키겠다’고 하더라”
“합의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 ODA는 15억 달러에서 2억 달러 증가한 것밖에 없지 않느냐. “나카소네 수상의 의향을 전두환 대통령이 높이 평가한다. 수상의 입지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양국 모두 설득 가능한 선에서 타결을 짓도록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일본 측이 총리 방한을 당일로 오겠다고 했다. 우리는 최소한도 2박3일은 돼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1박2일이 됐는데, 그때 세지마 씨가 타결점을 제시한다. 일본 측의 17억 달러와 한국 측 20억 달러의 중간인 18억5000만 달러. 이게 결국 타결된 마지막 선이다. 그래서 이것으로 한국 측 결단을 요구했고, 한국 측에서는 18억 달러와 20억 달러의 중간점인 19억 달러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결국은 그건 안 됐다.


이면접촉을 정리해보면, 총액은 한국과 일본 모두 40억 달러, ODA가 일본 17억 달러에서 한국 20억 달러, 수은자금이 일본 23억 달러에서 한국 20억 달러, 이런 차이가 있다. 기간은 한국은 5년인데 일본은 7년, 로컬 코스트 전용자금으로 ODA 30%, 수은자금 10%, 일본 측에서 15%까지 가능하다는 설명이 있었고, 한국은 30%였다. 이렇게 결국 양측 안이 좁혀지는데, 12월25일에 저와 최동진 국장이 일본에 가서 외무당국 간에 확인 작업을 했다. 세지마와 권익현 라인에서 오간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거다. 그랬더니 일본 측이 “상품차관은 절대로 안 된다. 수은뱅크론은 매년 50억 엔 선에서 가능하다. 총액 2억 달러를 초과할 순 없다. 1981년도 분은 공여할 수 없다. ODA 17억 달러는 이를 감안한 수치다. 일본 측 최종안은 교섭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는 거다. 일본 실무진이 정치타협한 18억5000달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정부 내에서 12월26일에 대책회의가 있었다. 그때 이범석 외무부장관, 노재원 차관, 저도 가고, 경제기획원은 정인용 차관, 김흥기 재무차관, 권태원 기획관리실장, 이용성 재무부 국제금융국장, 당에선 권익현 사무총장, 청와대는 김재익 경제수석이 각각 참석해 정부 최종 입장을 정리했다. 첫째, 나카소네 수상의 방한을 실현시켜 경협 문제의 타결이 필요하다. 둘째, 세지마의 방한을 수락하자. 그래서 수은뱅크론은 특사 방한 시 계속 협상을 하자. 수은자금 프로젝트는 사전에 커미트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등등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래서 세지마가 12월29일 방한해서, 이범석 외무부장관에게 제시를 한다. ODA가 18억5000달러, 내자전용분은 30%, 수은자금 21억5000만 달러, 선수금이 15%, 뱅크론은 연간 50억 엔으로 7년간 합계 1억4000만 달러, 그 후 1월5일 일본 실무진이 내한해서 우리 외무부에 이야기한 게 40억 달러, ODA 18억5000달러, 수은자금 21억5000달러, 이 세지마 안을 다시 확인한다. 금리도 이야기를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서류상으로 다 나온다.


그런데 또 마지막에 문제가 있었다. 이 합의 내용을 당연히 문서화해야 할 거 아니냐. 그런데 일본은 “문서화할 수 없다. 이건 우리 외상이 구두로 밝힌다. 말로 한 건 지키겠다”고 하는 거다. 일본 예산이 단년도식이라 수년도 앞의 예산을 행정부가 커미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댄 거다. 그래서 우리도 “예산은 단년식이다. 그럼 댐이든 시설이든 건설은 몇 년씩 하게 되는데, 그건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마찬가지 아니냐”하며 옥신각신했다. 일본 측이 끝까지 문서화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이 문제로 결국 일본 기우치 국장이 배앓이를 한 거 같다. 이 문제가 총리에게까지 올라갔고, 우린 급하니까 최경록 대사에게 총리를 만나서 담판 지으라고 도쿄에 타전을 한다. 특히 스노베를 비롯한 일본 인사와 접촉하도록 해서, “외상 간에서 문서를 교환하자. 아니면 이건 양 정상 간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정상 간에 이야기해야겠느냐”라 전했다. 그랬더니 일본 측이 타협안을 내오는데, 토의기록을 만들고 거기다가 이니셜을 할 것인지 검토해보겠다고 한다. 토의기록은 이니셜이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메모나 다름없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노신영 안기부장과 이범석 장관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연구해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래서 총리가 오니까 최경록 대사가 서울에 들어오시기로 돼 있는데, 이 문제가 타결될 때까지 서울에 오는 것을 보류하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어려웠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나카소네 총리가 방한한다. 그런데 1월10일 이때 아베 외무대신, 고토다 마사하루 관방장관, 기우치 국장, 하세가와 총리비서관이 배석해서 토의기록 서명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최경록 대사가 총리를 찾아가서 이야기한 거다. 그런데 실무자가 아닌 정치인이 서명할 경우에는 야당이 밀약이나 한 것같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정치가 사이에서 서명하기는 곤란하다는 나카소네의 설명이 있고, 평균금리는 6%대라고 하는 표현은 수은자금이 국제금리 영향을 받기 때문인데, ODA 부분이 크니 실제 금리는 그보다 더 낮아질 거니까 6%대라고 이야기해도 걱정할 거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카소네 총리는 1월11일 오후 1시 45분에 도착한다. 그 전날까지 총리에게 찾아가서 문서 문제를 계속 이야기한 거다. 참 어려웠다. 그리고 실무교섭은 일본 측이 일본으로 귀국하는 12일 새벽까지 옥신각신했다. 그래서 이니셜은 국장 간에서 하기로 하고, 이자율을 6% 전후로 타결된다. 그래서 1월12일 아침 10시 외상회담에서 양 외상 간에 합의 내용을 낭독하고 이를 양측 국장이 낭독한 문서에 이니셜을 작성하고 끝났다. 이후 양국이 정상회담 후에 공동성명을 냈는데, 제8항에 “대통령과 총리대신은 한국 정부 요청에 따라 양국 간에 교섭돼온 경제협력 문제에 관해 진지한 토의를 가졌다. 대통령은 한국의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을 중심으로 한국의 경제발전 전망에 관해 설명했다. 총리대신은 동 5개년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경제·사회 프로젝트에 대해 일본의 경제협력의 기본방침하에서 가능한 한 협력을 행할 의도가 있다는 뜻을 밝힘과 동시에 구체적인 협력 방안으로서 연차 베이스의 장기저리 정부차관을 포함한 각종 자금협력을 추진하겠다는 의향을 표명했다. 양국의 지도자는 그 제일보로서 금년도에 엔 차관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속히 양국 정부 간의 협의를 행하기로 합의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2년여에 걸친 교섭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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