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입 정황’ 들려…‘박정희 시해’ 김재규 유족 재심 청구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뉴시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올해 1월 개봉해 475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 속 김규평(이병헌 분)이 대통령 박통(이성민 분)을 저격하기 전 내뱉은 대사다. 대한민국 역사를 뒤흔들었던 사건 속 대사는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10대부터 20대 젊은 층이 즐겨 사용하는 유행어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 속 김규평의 모티브가 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범죄사실에는 이 발언이 적혀 있지 않다. 故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유족이 40년 만에 ‘진실을 밝혀달라’며 법원에 재심 청구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내란 목적 살인 혐의 아냐”
“‘가족 가만두지 않겠다’ 협박 있었다”

‘10·26 사태’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전 대통령경호실장 등을 총으로 쏴 암살한 사건이다. 김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뒤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권유에 따라 자신의 거점인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향했다. 그러나 이 판단은 최악의 실책이었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정 참모총장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체포를 지시했다. 결국 김 전 중앙정보부장은 27일 오전 0시30분경 헌병대에게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어진 재판에서 김 전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의 행동이 사리사욕을 채울 목적이 아닌, 유신의 잔재를 청소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은 김 전 중앙정보부장이 군 지휘관을 중심으로 입법과 사법, 행정권을 총괄하는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계엄군을 장악해 무력으로 사태를 정리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이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내란 목적 살인’ 등을 적용받은 김 전 중앙정보부장은 1980년 5월24일, 사건 발생 약 7개월 여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됐다.

40년 만에 다시 떠오른 ‘그날의 진실’
재판 결과 뒤집을 ‘명백한 증거’ 있나

40년 전 그날의 총성이 다시 대한민국을 뒤흔든 것은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유족이 지난 26일 법원에 당시 사건과 관련한 재심을 청구했기 때문이다. 유족 측은 얼마 전 발견된 재판 녹음테이프를 재심의 핵심 근거로 들고 있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은 이날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여동생 김모 씨를 대신해서 서울고등법원 형사과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민변 측은 “당시 보안사령부가 쪽지재판을 통해 재판에 개입한 사실과 공판조서가 당시 발언 그대로 적히지 않은 사실이 녹음테이프 녹취록을 통해 드러났다”면서 “당시 대법원에서는 ‘내란목적’ 범죄사실에 대해 8대 6으로 팽팽한 의견대립이 있었으나 변호인들조차 판결문을 열람하지 못했으며, 보도금지 지침으로 소수의견은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현행 형사소송법 제420조에 따르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이유는 7가지다. 먼저 무죄나, 면소, 또는 죄가 더 가볍다고 인정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롭게 발견됐을 때다. 유족 측은 이번에 발견된 녹음 테이프를 새로 발견된 ‘명백한 증거’라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녹음된 재판기록에 따르면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범행을 법률상 ‘단순 살인’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당시 대법원이 적용한 ‘내란 목적 살인’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변도 녹음된 재판 내용과 재판 기록 사이에 차이가 크다고 보고 있다. 일례로 김 전 부장은 재판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을 쏘며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외쳤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기록된 범죄사실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 판결 자체가 잘못됐다는 논리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기존 판결의 증거가 위·변조되거나 증언과 감정, 통번역이 허위로 증명됐을 때도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유족은 당시 재판 과정에서 절대적 증명력을 가졌던 공판조서에 허위내용이 담겼기 때문에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실제 김 전 중앙정보부장은 원심에서 일부 증인신문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며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은 “공판조서에 소송관계인들이 ‘별 의견 없다’고 진술한 것이 기록상 명백하다”며 이를 기각했다. 그러나 녹음내용에는 김 전 중앙정보부장 등이 “어제 피고인들이 퇴정하면서 증인신문이 있었는데 그 요지를 알려드리겠다. 피고인들에게 각별히 불리한 증언은 없었다”고 일방통보 받은 사실이 포함됐다.
더불어 재판에 관여한 법관과 검사 등 수사관, 사법경찰관 등이 직무와 관련한 죄를 범한 것이 증명될 경우에도 재심을 받을 수 있다. 녹음 테이프에는 “한 수사관은 공병 곡괭이 자루를 갖고 다니며 어깨를 치고 다른 방에선 비명소리가 들려왔다”면서 “이 상황에서 제가 그걸 안했다고 우겨봐야 거길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김태원 당시 중앙정보부 경비원의 최후 진술이 담겨 있다. 민변은 “김 전 중앙정보부장 역시 체포 후 서빙고 분실에서 전기고문 등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이 항소이유 보충서에 상세히 나와 있다”면서 “이는 공소를 담당한 수사관이 그 직무의 죄를 범한 경우”라고 강조했다. 또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조카인 김성신씨가 지난달 2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당시 조사관들이 김재규 부장 바로 밑 남동생, 저한테 둘째 외삼촌이 되는 김항규씨에게 ‘변호사를 물리치지 않으면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고 주장한 만큼 이 부분도 직무와 관련한 죄를 범한 경우로 주장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민간인 신분이던 김 전 중앙정보부장 등이 비상계엄에 따라 군법재판을 받은 점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란죄로 유죄를 확정 받은 점 등도 재심 청구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김 전 중앙정보부장 사건이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는지가 재심 개시 여부를 가를 전망이다.
김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은 현재 서울고법 형사7부에 배당돼 있다. 재판부가 재심 개시를 결정하면 공판절차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10·26 사태’의 숨겨진 진실이 40년 만에 밝혀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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