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4일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과 이수진 민주당 국회 당선인은 친일파 무덤을 묘파(墓破:무덤을 파냄)하자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국가보훈처 직원들은 백선엽(100세) 장군 측을 찾아가 “국립묘지법이 개정되면 백 장군이 현충원에 안장됐다가 다시 뽑아내는 일이 생길까 걱정된다.”고 전했다고 한다.

진보좌파에 의해 친일파로 매도된 백 장군을 국립묘지에 안장키 어렵다는 말이었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도 관련법상 백 장군은 “현충원 안장 대상이 맞다.”면서도 “장군 묘역이 가득 찬 상태”라며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런가 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 국회 당선인도 5월28일 백 장군이 일본의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며 친일파로 규정, 사후 현충원 안장에 반대했다.

백 장군이 북한 김일성과 항일독립군을 토벌했던 간도특설대에 일본군 장교로 배치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백 장군은 작년 6월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해 간 1943년 초 간도 지역”에는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항일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아가고 없을 때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독립군과 전투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실상 김일성은 백 장군의 간도특설대 부임 1년 전인 1942년 이미 소련으로 넘어갔다.

백 장군은 일본군 중위로 8.15 해방을 맞았다. 그는 귀국 후 평양에서 반공·반소련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약하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다. 북한의 6.25 기습남침 땐 육군 대령으로 개성지역을 지키는 1사단장이었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1년 만에 기습남침을 자행, 낙동강까지 다다랐다. 대구와 부산만 겨우 살아 남았던 일척간두의 위기였다. 이 때 백 장군은 6.25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 전투에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며 미군도 우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할 순 없다며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고 독려,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보병 1사단의 백 장군은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미군들은 백 장군 부대를 “가장 잘 싸운 부대”라고 극찬했다. 백 장군은 1951년 11월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돼 지리산 빨치산 소탕작전도 지휘했다. 1952년 31세로 한국군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33세 한국군 최초의 대장, 1957년 두 번째로 육군참모총장에 보임, 공산군 격퇴를 진두지휘한 국군의 상징이다.

백 장군은 전선에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외칠 만큼 임전무퇴의 용장이면서도 부하 장병에게는 따뜻한 어버이 같은 덕장(德將)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존댓말을 썼고 길가에 군인이 걸어가면 달리던 차를 세워 태우곤 하였다. 여권에서 백 장군을 친일로 몰자 원희룡 제주지사는 백 장군은 ”6.25의 이순신”이라고 반박했다.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 반대는 충남 현충사에 모신 이순신 장군 묘를 파묘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백 장군 현충원 안장 거부는 “6.25 전쟁 영웅”을 친일파로 몰아 북한의 적화남침을 북 주장대로 친일·친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해방전쟁”으로 정당화해주려는 붉은 책모가 아닌가 의심된다.

특히 김홍걸 당선자는 누구보다도 백 장군 현충원 안장을 반대할 사람이 못 된다. 그는 2002년 알선수재 혐의로 재판을 받으며 최후 변론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요”라고 진술했다.

그의 백 장군 현충원 안장 반대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가 말한 “조롱거리”로 들린다. 대한민국의 적화를 거부하고 자유를 지키려는 사람이라면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을 결코 반대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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