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초겨울 11월 말에는 어디로?


“11월은 가을일까. 겨울일까?”가을도 겨울도 아닌 이름 잃은 계절이 11월이다. “생각 좀 정리하겠다”며 혼자 훌쩍 떠나고 싶은 때이기도 하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11월의 날씨 마냥, 이룬 것 없어 뵈는 지난 한해 앞에 부산해지는 마음 때문이다. 혹여 앞만 보고 달려온 한해를 칭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고싶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마음 헤아려 우리에게 “지난 한해 잘 살아왔노라, 고민하는 일 모두 잘 될거라”며 다독여주는 공간이 있다. 현란한 동영상 보다 흑백사진 한 장이 더 어울리는 곳. 간이역이다.

▶ 삶의 애환이 서린 간이역

시골의 무명 간이역으로 유명(幽明)을 달리 할 뻔 했던 간이역들이 문화재로 되살아나게 됐다. 문화재청이 전국의 간이역 12곳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 한 것. 간이역은 일제 강점기·광복·한국전쟁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점철됐던 20세기의 역사이자 이 시기를 보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삶의 애환이 있는 곳이다.‘요즘사람’에겐 보기에 조금 허술하고, 번듯하지 않아도 푸근함이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근대사의 상징물로 우리들의 추억과 향수가 묻어있는 간이역들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어 시급히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고 간이역 문화재 등록 이유를 밝혔다.

▶ 경춘선 화랑대역, 경의선 일산역
우선, 서울시 노원구의 화랑대(경춘선)역이 첫 번째다. 화랑대 역은 서울과 춘천을 오갈 때 잠시 멈추는 역이다. “서울 시내에도 이런 예스러운 간이역이 있구나”하는 낯섦이 감성의 수치를 높인다. 1939년에 개통된 경춘선상의 역사인 화랑대역은 예전부터‘태릉갈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인근지역이 음식으로 유명해 시민들이 많이 찾던 간이역이다.
“이곳은 마치 유배지 같다. 그만큼 승객의 이용이 적고 시민들의 관심 밖에 있는 곳이다”. 화랑대역장의 말은 역으로 “북적이는 역을 기대한다”는 말로 들린다.
아파트촌 한가운데 위치한 일산역도 간이역의 풍경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1933년 건립된 일산역(경의선)은 원래 변두리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역내로 들어서면 시골스런 옛 모습 그대로다. 주변의 아파트 촌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 중앙선 팔당역, 구둔역
초록색 지붕을 얹고 지붕색 그것과 엇비슷한 빛깔 페인트를 칠한 자그마한 팔당역(중앙선)은 귀엽기까지 하다. 앞쪽으로는 춘천으로 가는 경춘가도가 보이고 한강 상류와 금단산이 인근에 있어 어디를 둘러봐도 풍취가 좋다. 그림이 좋은 것으로 치자면 경기도 양평 구둔역(중앙선)도 빠지지 않는다.
1940년에 건립된 이곳은 기차 이외에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다 보니‘그나마’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나물이 유명해 최근까지도 ‘나물따러’ 오는 이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영어체험 마을로도 알려지고 있다. 무뚝뚝해 보이는(?) 역무원들이 오래된 수목과 화단을 잘 가꿔둔 덕에 언제나 싱그러운 휴식을 전한다. 많은 사람이 찾진 않아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 경부선 심천역, 영동선 도경리역
충북 영동군의 심천역(경부선)은 국악체험지로 유명하다. 난계 박연 선생의 탄생지인 충북 영동군에 위치한 심천역은 대합실, 사무실, 숙직실 순서로 덮고 있는 지붕이 정감어린 곳이다. 특히 뒷산의 아름대운 배경과 함께 곧게 뻗은 철로 앞으로 시원한 금강이 흘러 눈이 시원해지는 만큼 마음까지 깨끗이 닦이는 곳이다.
도경리역은 도착하기 전까진‘이런 곳에 역이 있을까’싶다. 그만큼 오지라는 얘기다. 강원도 삼척시에 남아 있는 도경리역은 1939년에 건립된 역사로 영동선에 남아있는 역사중 가장 오래된 역사다. 마치 ‘미니어처’ 역사를 보는듯한 귀여운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전형적인 역의 모습을 띤다. 벽에 기대 만드는 부섭 지붕이 특징. 도경리역에 도착하면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철둑길’에 집중해 보자. 주변의 낮은 산능선, 계곡사이로 계천이 흐르고 있어 양팔을 벌려 철둑길을 걷자면 마음에 그려온 간이역 딱 그모습이 연출된다.

▶ 경전선 남평역, 전라선 율촌역
주변이 야산과 들판인 전남 나주시 남평역(경전선)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간이역이다. 1930년에 건립되었다가 1950년 여순반란사건으로 소실돼 1956년에 신축된 것. 철로 건너편 짙푸른 야산과 휘어져 내달리는 철로가 어우러져 시골역의 정겨움을 자아낸다. 대합실에서 나와 승강장으로 가는 길이 약간 휘어져 있어 오솔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라선인 여수의 율촌역(전라선)은 일제하에 지어진 일제강점기 건축물이다. 대합실과 역무실, 숙직실을 포함한 건물 구성은 독특하게도 지붕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하나의 건물이지만, 마치 지붕으로 그 기능을 구분할 것 마냥 복잡한 구조로 됐다. 특산물로 꼬막, 새조개가 유명하며 주변에 해수탕과 갯벌체험장이 있다.

▶ 동해남부선 송정역, 대구선 동촌역
부산시 해운대구에 위치한 동해남부선상의 송정역은 1934년에 건립된 역사다. 대합실·사무실·숙직실이 본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편. 특히 정확한 용도를 알 순 없지만(?) 한 켠에 세워진 창고 역시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양식을 띠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주변에 높은 호텔 등의 건물들이 솟은 가운데에도 나지막한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부산송정동장은 “도시에서 일출을 볼 수 있는 곳” 이라며 송정역 자랑이 대단하다. 송정해수욕장이 곁에 있어 찾는 이가 많다. 1938년에 대구선에 편입된 동촌역은 건립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주변에 팔공산과 동화사가 볼거리. 고운 레몬빛 하늘로 솟은 지붕의 독특한 디자인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자료제공 = 한국관광공사 / 사진제공 =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 드라마·영화 속 간이역들

곳곳이 스타들의 추억이 떠오르는 곳

간이역은 드라마나 영화속의 배경으로도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인 역이 영화 ‘편지’에 등장하는 ‘경강역’. 영화속 주인공인 환유(박신양 분)와 정인(최진실 분)이 처음 만난 곳이다. 정인은 경강역에서 서둘러 기차를 타다 지갑을 떨어뜨리게 되고 환유는 이 지갑을 주워 택시를 타고 기차를 쫓아간다.
‘엽기적인 그녀’에 나오는 일영역도 유명하다. 엽기적인 그녀와 견우가 타임캡슐을 묻고 기차역에서 가슴 아프게 엇갈리며 헤어지는 바로 그 기차역이, 서울을 바로 벗어나 장흥 가는 길에 있는 일영역이다.
드라마속 간이역으로는 역시 ‘모래시계’의 정동진역을 빼놓을 수 없다. 바닷가 바로 옆에 위치한 역으로 유명세를 탄 정동진역은 당시만해도 주변에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으나 지금은 강릉 지방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MBC 단막극 `간이역’의 무대로 등장한 ‘신남역’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04년 ‘김유정역’으로 이름이 바뀐 이곳은 강촌역과 남춘천역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춘천이 낳은 소설가 김유정의 문학적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의 시발점이다.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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