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동기를 캐고 있는 중입니다. 장 안토니오라는 사람이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긴 한데.”

“이름부터 특이하지 않습니까.”
주영준이 말을 거들었다. 벌써 12시가 넘은 시간이라 눈에 피곤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이태리에서 어느 상사 요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태리 사람이 조상이라는 이상한 책을 읽고 그것을 믿기 시작했다는군요. 거기에는 코리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법정 싸움까지 하면서 이름을 안토니오라고 바꿨답니다. 처음에는 성을 바꾸려고 했는데 법원 허가를 받지 못했답니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군요.”
“못 말리는 사람이지요.”
“서울에서 반핵운동 단체에 가담한 적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반핵 단체의 테러일 가능성도 있어서 그 방향으로도 수사하고 있습니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수원과 영준은 경찰서에서 나왔다. 발전소 본부에서는 백색경보도 해제됐다는 통보가 왔다.
“오피스텔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영준의 제의에 따라 수원은 오피스텔 앞까지 함께 택시를 탔다. 

7. 인터넷 타고 온 아버지

수원은 이튿날 열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늘어지게 잔 것 같았지만 전날 밤 한시가 넘어 들어와 두시 경에 잠들었으니 그렇게 늦잠을 잔 것도 아니었다.
거울 속 얼굴이 약간 부어 있었다. 

수원은 잠옷과 속옷을 모두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추어 보았다. 전보다 야위어 있었다. 울산으로 내려온 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 탓인 듯했다.

수원은 손에 비누 거품을 듬뿍 냈다. 그리고 아기 몸을 쓰다듬듯 자신의 온몸을 정성껏 마사지했다. 세월을 초월해 탄생한 나, 한수원. 
수원은 자신이 자기 하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했다. 무언가 더 숭고하고 의미 있는 목적에 쓰이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명감을 느끼곤 했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수원은 물을 뚝뚝 흘리며 맨몸으로 뛰어나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나야. 뭐해?”
배성민이었다. 
“샤워 중인데...”
“오, 굿 타이밍!”
“아이, 민망하게. 웬일이에요?”

“이번 토요일에 고리본부에 가게 될 것 같아. 고유미 씨가 그곳에서 잡지에 실을 대담을 나누어 달라는군. 정세찬 씨와 함께.”
수원에서 부탁했던 그 특집 건인 듯했다. 수원이 거절했더니 대담자를 배성민으로 바꾼 모양이었다. 

“원전 폐기물 문제와 관련한 취재도 겸한대. 원전 시설 취재는 어렵게 홍보실과 얘기가 됐나봐. 그때 시간 좀 훔칠 수 있을까?”
“훔칠 것 없이 내가 그냥 줄게요. 먼 곳까지 오는데. ”
“끝나고 나서 해운대 호텔에서 술도 한잔 하자고.”
“비쌀 텐데?”

“걱정 마. 내가 카드 시원하게 긁어 줄 테니까. 그럼 그 날 봐.”
성민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샤워를 마친 수원은 상쾌한 기분으로 컴퓨터를 열었다. 판도라 사이트부터 들어가 보았다. 아나톨리 게시판에 새로운 정보가 몇 개 올라 있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 탑승객 명단의 미스터리가 풀리다 
수원은 기도하듯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박동이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 무르만스크 대한항공 여객기 강제착륙 사건 당시 언론마다 탑승객 숫자를 달리 보도했다. 어느 신문은 109명이라고 했고 다른 언론은 110명이라고 했다.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면서 돌아온 사람은 사망자를 포함해 109명이었다. 이 가운데 2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사건 이후 소련군 정보부대 출신 사람들한테서 흘러나온 정보에 따르면, 당일 대한항공 902편 탑승객은 한국인 36명, 일본인 48명, 그 외의 나라 승객 13명 등 97명과 승무원 13명까지 합쳐 모두 110명이었다. 부상은 알려진 대로 13명이었으나 사망 또는 실종이 한 명 더 있어 모두 3명이라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일까? 

한국인 승객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정보부대원들이 그 사람의 이름까지 거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신빙성 있는 정보로 판단된다. 
그 한국인의 이름은 용국 한. 
여기까지 읽은 수원은 가슴이 뛰어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용국 한! 한용국! 

아버지였다. 수원이 수년간 찾아 헤맸던 아버지의 흔적이 지금 드러나고 있었다. ‘파리, 1978년’이라는 두 가지 단서만 갖고 추적해 왔던 막연한 사실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수원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심호흡을 했다. 아랫배까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몇 번 하자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 용국 한은 공식적인 탑승객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902편에 탑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탑승객 숫자 발표 시의 혼란, 함께 탑승한 사람의 기록, 이후 소련 정보원들의 증언 등이 그 근거다. 

무엇 때문에 용국 한은 탑승객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까? 무엇 때문에 소련 측은 그의 존재를 비밀에 붙였을까? 그는 죽은 것일까, 살아 있을까. 아니면 누구도 모르게 사라진 것일까? 

글을 올린 사람은 파리의 쟝 폴이었다.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쟝 폴은 연이어서 글을 한 개 더 올려놓았다. 
- 유령 승객의 정체 

이어진 글 역시 아버지 한용국에 대한 것이었다. 
- 사건 당시에도 이후에도 존재가 묘연한 유령 승객 용국 한. 그는 한국 정보요원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파리에 파견돼 밀약 중이었다. 
용국 한은 대한항공 902편이 파리를 떠나기 하루 전날인 1978년 4월 19일 한국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만났다. 이는 동영상 자료로 직접 확인했다(첨부 파일 참조). 

망명 중인 한국의 전 정보기관장과 현직 정보원의 밀회. 예사로운 만남이 아닌 게 분명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이 만남 이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온갖 의혹을 남긴 채.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두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왜 사라졌을까? 
수원은 쟝 폴의 게시 글에 첨부된 동영상 파일에 커서를 갖다 놓았다. 제목이 ‘kimhan19780419’로 돼 있는 파일이었다.  

‘정말 이 동영상 자료에 아버지 모습이 담겨 있을까?’
수원은 조금 전보다 가슴이 더 뛰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혹시 엉뚱한 자료라 실망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한참을 망설이고 있던 수원은 마침내 검지로 마우스를 두 번 두드렸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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