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룡사의 초입에서 맨 먼저 길손을 반기는 것은 한 쌍의 돌장승이다. 이 돌장승들은 절 입구의 호젓한 길목에 서서 오가는 길손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데, 툭 불거진 눈과 뭉뚝한 주먹코를 달고 있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돌장승을 뒤로하고 시원한 숲길을 조금만 더 오르면, 정갈하게 다듬어진 돌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이 끝나는 곳에 관룡사 일주문이 있다. 그런데 다른 절의 일주문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자연 그대로의 돌로 석축을 쌓아 돌문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올린 형태이다. 게다가 두 명이 나란히 통과하기도 비좁을 만큼 아담하다. 소박하고 단출한 관룡사의 매력은 이 일주문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고 다시 돌계단을 에돌아 관룡사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의 용마루 위로 치솟은 관룡산의 암봉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람한 암봉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신라천년의 관룡사

관룡사의 가람배치는 적당히 넓은 앞마당을 한 가운데에 두고 여러 채의 건물들이 추녀 끝을 맞댄 채 ‘ㅁ’자 형태로 촘촘히 들어선 형태이다. 그래서 위압감이 있거나 권위적이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산사 특유의 소박함과 고즈넉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관룡사는 신라 흘해왕 때인 서기 379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원효대사가 1천여 명의 대중을 상대로 화엄경을 설법하며 대도량을 이룩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에는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도 꼽혔다고 한다. 그러다 훗날 임진왜란 같은 전란과 화재를 겪으면서 사세(寺勢)가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1704년에는 대규모의 산사태가 발생해 금당(金堂)과 부도밭이 유실되고, 스님 20여명이 목숨을 잃는 참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대웅전, 약사전, 칠성각, 명부전, 산령각, 누문, 요사채 등 오늘날까지 남은 건물의 대부분은 그 뒤에 중건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각각 보물 제212호와 보물 제146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약사전은 당대 건축 수법과 아름다움을 대표할 만한 건물의 하나로 꼽힌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용선대

조선 후기에 중건된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본존불을 모신 금당답게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는 외관도 눈여겨볼 만하지만, 갖가지의 정교한 조각과 금(錦) 단청으로 치장된 법당 내부의 모습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하늘에서 피리를 불며 내려와 부처를 찬양하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 사슴 같은 길상수(吉祥獸) 등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는 수미단(須彌壇:불상의 대좌)이 눈길을 끈다. 고려 후기의 약사여래불(보물 제519호)이 봉안된 약사전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1704년 당시 산사태의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다. 네 면이 모두 한 칸씩에 불과할 만큼 규모가 작고 아담하면서도, 작은 몸체에 비해 지붕의 폭이 갑절쯤 크다는 점이 독특하다. 관룡사에서 750m 가량 떨어진 산중턱에는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이 있다. 명부전과 요사채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가파른 솔숲길이 끝나고 갑자기 집채만한 바위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이 용선대라는 바위 위에 천년의 모진 풍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사바세계를 굽어보며 상념에 잠긴 부처님이 정좌해 있다. 우뚝한 코와 가늘게 뜬 눈,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이 자비로운 부처의 모습 그대로이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까닭은, 불상의 전체적인 모습이 석굴암의 본존불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하지만 불상 자체보다는 그 위치가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의 탁월한 위치를 한눈에 파악하려면 능선 쪽으로 10여m쯤 떨어진 곳에 솟아 있는 바위 위에 올라서야 한다. 이곳에서는 산 아래의 올망졸망한 민가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용선대의 위용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반야용선(般若龍船), 곧 지혜의 배를 탄 부처님이 번뇌와 우매(愚昧)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세계로 향하는 모습이 장엄하기 그지없다.


용선대 위용 장엄

용선대의 부처님을 지나 정상부의 암벽지대로 올라서면 골짜기를 둘러싸는 형태로 지어진 포곡식산성인 화왕산성(757m)의 자태를 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의 둘레는 약1.8km로, 동쪽 성벽의 대부분은 돌로 쌓았으며, 서쪽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성벽은 높은 곳이 4m 정도로 폭은3∼4m이다. 자연암벽의 틈새는 성벽을 높게 쌓았다. 산성의 출입구로 보이는 서문은 흔적도 찾기 어려우나, 동문자리 좌우의 석벽은 잘 남아있다. 이 석벽은 다른 부분의 성벽과 달리 가로 1m, 세로 1.6m나 되는 큰돌로 쌓았다. 관룡사쪽의 동남쪽 성벽에서는 무너져 내려앉은 수문이 확인되고 있다. 산성에서는 남쪽으로 영산 방면과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현풍 방면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위치는 이 일대에서 화왕산성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적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화왕산성은 조선전기에 폐성됐다가 임진왜란 때인 1595년에 다시 쌓았고, 그 이듬해에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 성을 근거로 의병활동에 나서면서 내성을 쌓았다 한다. 성안에는 군량미를 저장하는 군창, 9개의 샘과 3개의 연못 등이 있었으며 3개의 연못을 비롯한 많은 건물터들이 지금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창녕 조씨가 이곳에서 성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새긴 창녕조씨득성비도 있다.

낙동강 창녕은 제2의 경주

낙동강 유역에 자리잡은 창녕군은 예로부터 땅이 비옥한 덕택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지금도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어서 ‘제2의 경주’라 불리기도 한다. 국가지정 문화재만 꼽아보더라도 교동,송현동의 고분군(사적 제81, 82호), 진흥왕 순수비(국보 제33호), 화왕산성(사적 제64호)과 목마산성(사적 제65호),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 송현동석불좌상(보물 제75호), 석빙고(보물 제310호), 영산만년교(보물 제564호), 술정리 하병수씨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0호) 등이 남아 있다. 자료제공 : 한국관광공사

# 철새들의 휴식처 ‘우포늪’

늪지대란 느낌이 주는 ‘황량함’ 탓일까? 경남창녕의 3대 관광보고로 일컬어지는 우포늪은 항상 한산한 느낌을 준다. 옆에 있는 화왕산이 진달래와 억새로 봄·가을마다 몸살을 앓고, 유황수가 넘쳐나는 부곡온천도 웰빙을 타고 인기를 끌고 있지만 우포늪은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그러나 우포늪은 매력적인 곳이다. 전국 최대규모의 내륙습지로 알려진 이곳이야말로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창녕 우포늪은 어떤 곳?

우포늪의 생성 시기는 약 1억 4천만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구를 뒤덮은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고 낙동강 유역의 지반이 내려앉았다. 그 결과 이 일대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이 고이게 되었고 곳곳에 늪지와 자연 호수가 생겨났다. 우포늪이 고마운 것은 크기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생물이나 멸종 위기에 놓인 동식물들을 다 보듬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40여종의 철새를 비롯해 29종의 어류와 37종의 곤충, 72종의 수생식물 등이 확인됐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생명체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자기 체험은 어때?

우포늪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지면의 대학초등학교. 폐교가 된 이곳에는 ‘그륵 꿈는 집’이라는 도자기 체험장이 들어서 있다. 의도적으로 틀리게 쓴 맞춤법으로 인해 정감이 가는 이곳은 사촌 오누이 지간인 김종구씨와 진숙씨가 운영하고 있다. 학교의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꽤 인기가 높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알음알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곳의 매력은 가족 같은 분위기. 도자기 굽는 일을 가르치는 김씨는 하룻밤 묵는 손님들과 어울려 술도 한잔 하고 노래도 부르는 등 어울림의 재미가 있다고 했다. 여행객들이 직접 만든 도자기는 가마에 넣어 구워서 말린 후, 직접 방문하거나 택배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역사 체험도 있어요

창녕군청 가까이에 위치한 교동고분군은 창녕이 과거 가야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6가야 중의 하나인 비화가야의 무덤들로 알려진 교동고분군은 현재 사적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마치 고령의 대가야고분의 축소판처럼 그 모양새가 쏙 빼닮아 눈길을 끈다. 발굴 당시 금봉관·순금이식 등 각종 귀금속으로 장식된 장신구와 철제 무구·토기 등 다량의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1918~1919년 일본인에 의해 그 일부가 발굴 조사되어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있다. 현존하는 고분 중 21기는 모두 복원한 것으로 그 중 1기는 입구 쪽을 개봉해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바로 옆에 있는 창녕박물관에선 이곳 고분의 조성방법과 형태, 가야시대의 창녕 역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교동고분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만옥정공원’도 잠시 자동차를 세우고 둘러볼 만하다. 면적 1만㎡의 도시공원인 이곳은 아담해 운치 있는 소공원일 뿐 아니라 국보 제33호인 진흥왕척경비를 비롯해 토천 3층석탑·창녕객사 등 많은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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