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 따라 돌아가는 좁고 구불거리는 풍경엔 우리들만의 무언가가 있었다. 가슴 두근거리며 돌담 너머로 남몰래 눈빛을 주고받았던 사춘기 설렘이 있었고, 금방 부쳐낸 따끈따끈한 부침개를 넌지시 건네는 동네 아낙들의 인정이 있었고, 돌담길 모퉁이 살짝 돌아들어서면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숨어 있었다. 오랜 세월 풍우를 견디며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품에 담은 돌담길이 아스팔트의 힘에 밀려 자취조차 감추어 버린 지금, 오래 묵은 그 길이 마냥 그리운 것은 왜일까. 경남 고성에 가면 낡았지만 오래 돼 그 만큼 따뜻한 정취가 느껴지는 돌담길을 만날 수 있다.




고성의 학동마을이 조성된 시기는 17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어느날 선조의 꿈 속에 학(鶴)이 마을에 내려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날이 밝아 그 곳을 찾아가 보니 과연 산수가 수려하고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므로, 명당이라 믿었다. 이곳을 학동이라 명명하면서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이 학동마을이다.

17세기 조선을 옮겨 놓다

마을 입구에 이르면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느껴지는 학동마을의 빼어난 지세에 입이 벌어진다. 수태산 줄기가 마을 뒤로, 마을 앞은 좌이산이 솟아 있는 소위 ‘좌청룡우백호’의 지세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마을 옆으로는 학림천이 흐르고 있어 전통마을의 배산임수형 입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마을의 가옥은 새마을운동 당시 대부분 슬레이트 기와로 개량되었으나 문화재자료 제208호 ‘육영재’ 등 일부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어 전통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특히 마을을 휘감고 있는 돌담길에는 어린 시절 추억이 아른거린다.

학동마을의 담장은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판석 두께 2~5㎝)과 황토를 결합하여 바른층으로 쌓은 것으로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건물의 기단, 후원의 돈대 등에도 담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석축을 쌓아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토담길도 약 2,300m에 달한다. 마을 주변의 대숲은 돌담길과 어우러져 남도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수 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고성(古城)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마을 안길의 긴 돌담길, 이곳을 걷노라면 아련한 고향의 추억과 함께 나를 부르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공룡엑스포’ 막바지 공연 ‘한창’

학동마을 인근에 위치한 당항포 관광지도 둘러볼 만하다. 당항포는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의 당항만에 위치한 당항포해전 대첩지로서 선조 25년(1592)과 27년(1594) 두 차례에 걸쳐 이충무공이 왜선 57척을 전멸시킨 곳이다. 때문에 기념사당(숭충사), 당항포해전관, 전승기념답, 거북선체험관 등이 마련돼 있다. 당항포 관광지는 다목적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충무공의 기념관 외에 동물류의 박제, 공룡알, 어패류의 화석 등을 전시한 자연사관, 야생화와 어우러진 자연조각공원 및 수석관으로 구성된 자연예술원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호수와 같은 잔잔한 바다가 어우러진 자연경관에 펼쳐진 청소년 모험 놀이장, 레저를 겸한 체육시설 등도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 자연교육 및 가족, 단체 휴식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특히, 1억년 전의 물결자국, 공룡발자국화석 등은 당항포 관광지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고성에선 갑작스런 공룡의 죽음과 모래바람의 퇴적으로 인한 ‘죽은 시체(골격화석)’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수천 개의 ‘살아있던 공룡’이 남긴 화석(발자국화석)이 발견된다. 이는 그 옛날 고성이 공룡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살아있는 자료이다. 상족암 해안 지층은 당시에는 거대한 들판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넓은 지역의 지반이 완벽하게 헝클어져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발견되는 수 개의 듬성듬성한 발자국들에 비교한다면, 1억년 전의 상족암은 셀 수 없는 만큼의 공룡이 뒤엉켜 살았다는 말이 된다. 이를 근거로 한 ‘2006경남고성공룡세계엑스포’는 막바지 공연이 한창이다. 관광지에 조성된 특별행사장과 상족암군립공원에서 지난 4월14일부터 열리고 있는 공룡엑스포는 오는 6월4일 폐막이 예정됐지만, 다양한 행사를 참관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호수 드리운 ‘연화산’ 풍광 일품

당항포 관광지 인근, 연화산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창건된 옥천사가 위치해 있다. 의상대사가 국내의 영지를 가려 세운 많은 사찰을 화엄십찰이라고 일컫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옥천사다.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을 한 연화산의 옛 이름은 비슬산이었는데, 폐허나 다름없던 옥천사가 인조 때 중창되면서 산 이름도 연화산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경내에 달고 맛있는 물이 끊이지 않고 솟는 샘이 있어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불렀다. 하지만 옥천이란 이름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그 옛날 사찰에 있는 샘에서 물이 아닌 공양미가 나왔다. 한꺼번에 많은 쌀을 얻겠다는 욕심으로 바위를 깨뜨려 결국 영원히 공양미를 얻을 수 없게 됐다는 전설. 욕심은 영원한 자비심까지도 파괴한다는 가르침을 설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부처님의 자비심을 베풀어 공양미 대신 맑고 맑은 신비한 샘물을 다시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옥천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는 법. ‘영험이 있는 약수’라 해서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어 목욕까지 하는 통에 신비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깨끗한 물만은 남아 우리나라 10대 명수 중 하나로 꼽힌다. 옥천사의 유래야 어찌됐든 옥천사를 찾는 이들은 옥천의 물맛을 꼭 보고 내려간다. 동으로 만든 악기인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도 옥천사를 찾는 이들의 관전 포인트 중의 하나이다. 옥천사를 찾는 이들 가운데는 “옥천사의 매력은 옥천사에 이르는 오솔길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옥천사를 알리는 입구 옆에 조그마한 호수 하나가 있는데, 옥천이 씻어낸 군상들의 찌꺼기 때문인지 그리 맑지는 않지만, 물 위에 드리워진 연화산의 그림자가 일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날 떨어진 단풍잎은 또 다른 그림을 그려놓곤 한다. 옥천사의 오솔길은 백련암 청련암과 샛길에 있는 연대암 등 암자로 이어지는 길에도 펼쳐져 있다. 암자로 가는 길은 하늘을 가리고 서 있는 나무들이 훌륭한 터널을 만들어 놓아 여름날의 뜨거운 태양도 막아준다. 측백나무길 참나무길 등으로 이어진 길들을 지나가면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노송들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얼마나 큰 나무일까 싶어 두 팔을 벌려 안아보아도 절반이 잡히지 않는다. 자료제공:한국관광공사·고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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