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밖에서 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두툼하면서도 다부진 체격이었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카메라에 얼굴이 잡혔다. 
중년의 신사. 이마가 훤하고 약간 살이 찐 얼굴.

김형욱. 그 사람이었다. 인터넷 검색에서 찾아본 사진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김형욱의 시선이 길 건너로 고정되었다. 그 쪽에서 젊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검정 바탕에 가는 체크무늬가 있는 재킷을 입고 있었다. 바로 수원의 책상 앞에 놓인 부모님 사진, 그 사진 속에서 입고 있는 바로 그 옷이었다. 아버지가 파리로 떠나기 며칠 전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라 했다. 

‘아버지.’
수원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말이 밖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동영상 속의 아버지가 자신의 외침을 알아들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남자 앞에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은 처음 본 듯 악수를 나누고 이내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김형욱이 한용국의 어깨를 감싸고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한용국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카메라가 잠시 흔들리더니 동영상이 끝났다. 수원은 아쉬움과 감동으로 가슴이 벅찼다. ‘아버지를 동영상으로 보다니...’ 
꿈만 같았다. 마치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다.  
‘정부의 기관원인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조국을 배신한 김형욱을 만난 것일까?’ 
서로 어깨를 나란히 걷는 것으로 보아 대결하려고 만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도 김형욱처럼 박정희를 배신한 걸까?’
‘아니면 박정희의 경고를 전달하러 간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알지 못할 모종의 임무를 띠고 만난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던 수원은 어머니 김윤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버지 동영상이 담긴 자료를 구했어요. 아버지가 맞나 확인해 주세요.”
수원은 동영상을 이메일로 보냈다. 어머니는 무슨 얘긴지 감을 잡지 못하는 듯 예사롭게 “으응, 그래. 열어 볼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가 맞다 맞아.” “맞아요? 정말 맞지요?”
어머니의 확인을 받으니 수원은 더욱 감격스러웠다. 
“체크무늬 재킷도 그렇고, 안에 입은 하늘색 셔츠도 내가 사 준 거야. 얼굴이며 체격, 아버지가 틀림없어.”
“그렇구나. 우리 아버지구나.”

수원은 동영상에서 아버지가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또 봤다. 
“세상에. 너희 아버지를 볼 수 있다니. 이게 정말 꿈이니 생시니.” 
어머니는 감격에 겨운 듯 목이 잠겼다.  

“동영상을 어떻게 구했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없어? 어디서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없을까? 어디 묻혔는지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좀더 알아볼게요. 기다려 보세요.”
수원은 전화를 끊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한국의 Onesil입니다.
수원은 능숙한 프랑스어로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onesil은 수원의 아이디였다. 자신의 이름 끝 자와 어머니의 이름 끝 자를 따서 합성한 것이었다. 

- 무슈 쟝 폴, 안녕하십니까. 
대한항공 여객기 강제착륙 사건에 대한 새 정보 반갑게 보았습니다. 작성하신 글에 나오는 용국 한이 아무래도 저의 아버지 같습니다. 인적사항과 동영상 속의 모습이 일치합니다. 
저는 그동안 아버지 죽음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아버지 죽음의 의혹이 밝혀지기를 열망하며 살아 왔습니다. 

앞으로 관련 정보를 입수하면 꼭 알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동영상 자료를 어떻게 구하셨는지 알려 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메일을 보내면서 수원은 책상에 놓인 부모님 사진을 스캔하여 첨부했다. 동영상 속에서와 같은 옷을 입은 아버지 사진을 보내면 쟝 폴이 자신의 말을 신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다음 수원은 아나톨리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영어와 프랑스어 두 가지 말로 작성했다. 

- 용국 한에 대한 정보를 부탁드립니다. 
무르만스크 대한항공 여객기 강제 착륙 사건에 관심 갖고 계시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파리의 쟝 폴이 올린 글에 등장한 유령 탑승객 용국 한이 아무래도 저의 아버지인 것 같습니다. 

뒷부분은 쟝 폴에게 보낸 메일과 비슷하게 썼다. 수원 모녀가 아버지 죽음의 의혹을 풀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게시판에 올리거나 자신의 이메일로 보내 달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그사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배가 고팠다. 왠지 사람이 그립기도 했다. 동영상으로나마 아버지를 만난 감동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수원은 휴대폰에 입력된 전화번호부를 불러왔다. 가나다순으로 하나씩 이름을 훑어보았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주영준. 010-3734-.’
주영준이란 이름에 이르자 수원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쉬는 날 웬일이십니까?”
영준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반가움이 약간 묻어 있었다. 
“휴일인데 어디 나가시지 않았어요?”

“웬걸요. 아침부터 경찰에 가서 수사를 돕다가 조금 전에 나왔습니다.”
“점심은요?”
“아침을 늦게 먹어서 아직.”
“잘됐네요. 저도 아직이거든요. 고생 많으셨는데 제가 살게요.”
얼마 후 두 사람은 해운대 해변 뒷골목의 유명한 복 요리집에서 만났다. 건물은 허름했으나 소문대로 맛이 뛰어났다. 담백하면서도 깔끔했다. 

“주 차장님 아버님은 어떤 일 하세요?”
수원이 후식으로 나온 매실차를 마시면서 물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십니다. 타고난 교육자시지요.”
“아하, 그래서 아드님이 이렇게 반듯하구나.”
영준은 일요일임에도 깨끗한 양복 차림이었다. 

“뭘요. 어려선 개구쟁이라고 야단 많이 맞았습니다. 수원 씨 아버님은요?”
꼬박꼬박 성에 직책을 붙여 부르던 영준이 수원의 이름을 불렀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예?”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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