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빈소에 고인이 영정이 놓여 있다. 고 홍사덕 전 부의장은 향년 77세로 17일 밤 숙환으로 별세했다. 2020.06.18. [뉴시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빈소에 고인이 영정이 놓여 있다. 고 홍사덕 전 부의장은 향년 77세로 17일 밤 숙환으로 별세했다. 2020.06.18. [뉴시스]

 

[일요서울] 제16대 국회(상반기)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6선의 홍사덕 前 의원이 지난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지난 1981년 정계에 입문한 홍 전 부의장은 정치권의 양 진영을 오가며 지난 2017년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계를 완전히 은퇴했다.

지난 1943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홍 전 부의장은 영주중학교에 이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에 입학 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해 졸업장을 따냈다. 해병대에 입대해 병역 의무를 수행했고, 지난 1968년에는 중앙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으로 당선됐다.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을 하면서 대변인직을 맡기도 했다. 당시 그는 촌철살인의 논평으로 명성을 얻었다. 심지어 ‘홍사덕 라디오 칼럼’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정치평론이 나왔는데, 이는 대중의 관심을 모았고 이후 5권의 ‘홍사덕칼럼’으로 세상에 다시금 나왔다.

그의 정치인생은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이어졌다. 그러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를 서울특별시 강남구을로 옮긴 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다 1990년 민주당에 속하게 됐는데, 2년 후에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강남을 후보로 나서 당선됐다. 그해 故 김대중 대통령 당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인정받으면서 영남 출신의 동교동계 인물로 입지를 굳혔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도 참여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을의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4선을 달성했다. 그 다음 해 김영삼 정부의 정무제1장관이 됐다.

하지만 서울시장에 대한 꿈을 달성하고자 국회부의장에 선출됐음에도 지난 2001년 사임한다. 그러다 서울시장 경선 후보로 나섰지만 당시 후보로 이명박 前 대통령이 나오면서 경선을 포기했다. 이후 한나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가 됐는데, 이라크 파병하면 한 달 동안 사병으로 근무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2004년에는 故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참여했다. 하지만 탄핵 역풍을 맞아 한명숙 당시 후보에게 밀려 그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여러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던 홍 전 부의장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 당시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친박연대 후보로 나서 대구광역시 서구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고, 공천에 불복해 탈당했던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지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정세균 現 국무총리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의장이 됐다. 그러다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으로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고, 계속 대표상임의장직을 수행했다. 그러다 지난 2017년 정권교체 이후 완전히 정계를 은퇴했다.

여담으로, 홍 전 부의장은 삼성그룹의 이건회 회장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절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난 1997년 출간된 이 회장의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는 홍 전 부의장이 썼던 ‘내가 만나본 이건희 회장, 애벌레 시절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홍 전 부의장 책 ‘지금 잠이 옵니까?’에도 이 회장과 관련된 일화가 등장한다. 이 회장과 각별한 인연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지난 18일,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그의 빈소에는 이 회장의 조화가 나란히 놓였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임경미 씨와 그의 자녀 재선 씨, 은진 씨, 세나 씨가 있다. 발인은 2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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