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장관들’의 오늘과 내일

새 정부 출범을 며칠 앞둔 가운데 각 부처 ‘마지막 장관’들의 행보가 심상찮다. 올 들어 국정브리핑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체념형’ 장관이 있는가 하면, 어떤 장관은 국무회의 대신 자신의 예비총선 출마지에서 ‘표밭 갈기’에 한창이다. 물론 꾸준히 제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장관들도 있다.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노무현 정권 말기를 맞은 행정부처 수장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뒤따라 가본다.

정부조직개편안이 발표된 뒤 각 부처 장관들이 보인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지난해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꼿꼿한 자세로 악수해 ‘꼿꼿 장수’로 불리는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끝까지 맡은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각오다.

그는 군 안팎에서 유임설이 나돌자 “내 거취에 일절 신경 쓰지 말고, 안보태세에 만전을 기하라”고 전군에 당부하기도 했다.


“끝까지 최선”

‘무색무취 모범생’이란 별명처럼 성실하기로 소문난 김영주 산업자원부 장관은 정부조직개편안 폭풍 속에서도 부처수장으로서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는 평이다. 오전 7시30분이면 정확하게 청사로 출근,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챙긴다.

설계수명이 끝난 고리원전 1호기가 성공적으로 재가동될 수 있었던 것도 김 장관의 이 같은 성실함 때문이라는 게 주변사람들의 전언이다.

지난해 9월 취임한 정성진 법무부 장관 또한 공정하고 투명한 사면권 행사를 위해 3월부터 도입될 사면심사위원회 구성에 만전을 꾀하고 있다.

그는 ‘BBK특검’의 위헌성을 계속 제기하면서 “법률가적 판단”임을 거듭 강조했다.

다른 국가들과 교류가 잦은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도 평소 소신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며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요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4강국 특사단 파견과 관련, 나라별 현안과 현지상황에 맞춰 적극적인 지원을 지시하고 있다. 또 새 정부에서 합쳐질 것으로 보이는 통일부와의 실무적 통합안도 꼼꼼히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통관료출신인 김종민 문화관광부 장관 또한 남은 임기를 마무리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김 장관은 지난 21일 대한장애인체육회가 마련한 장애인체육가족 신년하례식에 참석하는가 하면 29~30일 열리는 베이징올림픽 핸드볼 아시아예선 재경기를 앞두고 대한핸드볼협회와 4000여명의 응원단을 꾸리는 등 이 경기에 힘을 쏟고 있다.


“볼 장 다 봤다”

이렇듯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장관들이 있는 반면 “이미 다 끝났다”며 모든 업무에서 손을 땐 이른바 ‘무책임형 장관’들도 없지 않다.

교육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담당 부처 수장인 김신일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은 현재 국내에 없다. 아제르바이잔과 교육협정을 맺기 위해서다.

1월 23일 두바이로 떠난 김 부총리는 27일 터키를 방문한 뒤 29일 돌아올 예정이다.

교육부 일각에선 “교육정책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는 때 교육부총리가 자리를 비우는 건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김 부총리 쪽은 “이번 일정은 지난해 확정된 것이다. 불참하면 국가신인도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명했다.

한편 재정경제부 출입기자들은 올 들어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국정브리핑을 들은 적이 없다.

재경부 관계자는 “인수위가 새 정책기조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례브리핑을 갖고 정책방향을 설명하는 게 적절치 않다. 5년 전에도 똑같이 그랬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이런 해명에도 관가에선 ‘최근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 등에 따라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물가 급등 우려마저 있는 상황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가 움직이지 않는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오는 상황이다.

‘장관급 차관’으로 통했던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요즘 이렇다 할 대외활동 없이 지내고 있다. 매주 화요일 국무회의 직후에 브리핑을 하는 게 언론에 공개되는 유일한 모습이다. 대선 전까지 취재지원선진화방안과 관련, 정부중앙청사와 별관을 부지런히 오가며 사람들을 만나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마음은 표밭”

본연의 업무보다 ‘잿밥’에 마음이 가 있는 장관도 여럿이다.

22일 오전 9시30분 청와대 세종실. 올 들어 세 번째 열린 국무회의에 기획예산처는 장병완 장관이 아닌 반장식 차관이 대리 참석했다.

국무회의에 올라온 안건 중엔 예산처 소관인 ‘2008년도 일반회계 예비비 지출안(국가안전보장을 위한 활동경비)’도 있었지만 장 장관은 지방행사를 이
유로 자리를 비웠다. 대신 장 장관은 오전 7시 광주광역시에서 광주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조찬세미나에 참석, 강연을 했다. 오는 4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광주시 북구 갑지역에 출마할 장 장관이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지역행사에 내려간 것이다.

그는 강연에서 광주·전남지역 사회간접자본(SOC) 예산확충과 관련 “정부예산지원은 타당성 있는 사업을 치밀하게 설계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어 내가 쌓은 경험을 총동원,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지역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며 공공연히 총선출마의지를 내비쳤다.

임상규 농림부 장관도 총선 출마여부를 타진하면서 성과 만들기에 적극 나서는 모습이다. 임 장관은 지난해 장관 취임 뒤 농업·농촌·식품산업기본법 개정과 식품산업진흥법 제정이라는 두둑한 성과물을 챙긴데 이어 퇴임 전에 ‘식품산업발전종합대책’까지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용섭 건설교통부 장관은 7일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에세이집 ‘초일류 국가를 향한 도전’ 출판기념회를 열고 ‘금배지를 향한 도전’을 사실상 선언했다. 출판기념회가 이날 오후 6시부터 시작돼 건교부 업무에 별 지장은 없었지만 그날 오후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대한 업무보고가 있었다. 이 장관은 전남 함평-영광 또는 광주 광산지역을 놓고 출마 저울질을 하고 있다.

서울시 중랑구 갑지역을 노리는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22일 ‘고별 기자간담회’를 열고 총선 출마 배경과 의정활동계획까지 밝혔다. 이 자리에서 이 장관은 한나라당 입당을 검토하고 있는 조순형(무소속) 의원을 겨냥해 “이제 그만 정계 은퇴하시라”는 막말도 했다. 그는 “2월 4일 께 퇴임식을 갖고 설 연휴부터 선거운동에 나설 예정”이라며 “당선 되면 (이명박 정부) 권력이 오만하게 나가는 것을 막겠다”고 말했다.

박명재 행정자치부 장관은 총선출마설에 대해 “거취를 고민 중”이라며 부인하지 않고 있다. 정치권에선 박 장관이 고향인 경북 포항이나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안양시 중 한 곳을 고를 것으로 보고 있다. 박 장관은 30일 거취를 밝힐 예정이다.


“임기만이라도…”

지난해 8월 초 취임한 김용덕 금융감독위원장은 유임을 기대하며 물밑에서 활발히 뛰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같은 고려대출신이란 학연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눈치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말 대통령 선거 직후 이명박 당선인의 고려대 경영학과 1961학번 동기인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는 이때도 “김 위원장이 학연 덕을 볼지 모른다”는 얘기가 돌았다. 특히 김 위원장은 이달 초 열린 고대교유회(동창회) ‘신년 교우회에 이 당선인이 참석한다’는 얘기가 나돌자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취임해 유임설이 나도는 한상률 국세청장은 최근 ‘친기업적 세정’을 강조하는 등 새 정부의 국정운영방침에 부응하는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한 청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일자리를 늘리는 회사나 성실납세기업에 대해 세무조사를 유예하거나 면제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납세자를 섬기는 세정’을 강조하기도 했다.

2006년 3월 취임해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재계 및 연구소 사람들과의 간담회에서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뒤 생기는 빈 공간을 공정위의 감시로 메워야 한다”며 출총제 폐지의 대안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공직사회 일각에선 “출총제 유지란 기존 정책기조를 바꾼 발언”이라며 ‘권 위원장 임기가 1년 이상 남아있는 만큼 새 정부 출범 뒤에도 임기를 꽉 채워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지난 11일, 18일 기자간담회를 잇달아 갖는 등 갑작스레 언론접촉을 강화하고 있는 강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은 23일 삼성중공업 임원들을 서울시 종로구 계동 장관 집무실로 불러 “삼성중공업에서 피해어민들을 위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라”며 ‘피해보상금 지원’을 요구했다.

이를 두고 해수부 안팎에선 장관이 부처 존속을 위한 우호 여론 조성을 위해 전시행정을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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