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北에서 돌아오지 못한 ‘18만 국민’…가족들 기억은 70년 전에서 ‘멈춰’

[일요서울ㅣ조주형 기자]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 어느덧 70주년을 맞이했지만, 전쟁의 상흔(傷痕)은 그대로다. 70년 전 북한으로 끌려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8만 명의 ‘국군포로’, 여전히 생사불명인 10만 명의 ‘6·25전쟁납북피해자’들의 기억은 70년 전에 멈춰 있다. 미래통합당 신원식 의원 등은 지난 2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정부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를 버리고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국군포로 송환 대책을 추진하라”고 성토했다. 이에 일요서울은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50년간 북한에서 국군포로로 잡혔다가 조국으로 돌아온 귀환용사와의 ‘실제 대면 인터뷰’와 ‘6·25전쟁납북피해 진상조사보고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 위치한 '6·25전쟁 납북자 기념관' 내부의 한 모습. [조주형 기자]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 위치한 '6·25전쟁 납북자 기념관' 내부의 한 모습. [조주형 기자]


-50년 만에 돌아온 국군 귀환용사 유 씨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정인보·이길용·구자옥 등 6·25전쟁 납북 피해 ‘10만 명’…“생사만이라도”



북한의 도발로 전(全) 국토가 파괴되고 수백만 명의 사상(死傷)자가 발생한 6·25전쟁이 불과 70년 만에 우리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모양새다. 특히 나라를 지키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일명 ‘국군포로’ 송환은 어떤 움직임조차 없는 형국이다. 공공연하게 들려오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구호가 무색하다. 그런데, 비극은 비단 이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로 153. 일요서울은 지난 1월 임진강 철교와 통일대교가 위치한 파주 임진각의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 다녀왔다.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은 ‘6·25전쟁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난 2013년에 착수, 4년 만인 지난 2017년 11월 완공됐다. 기념관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이자 우리의 소중한 가족, 이웃이었던 납북자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이들을 기억한다’라고 밝혔다. 

임진각의 평화랜드·평화공원을 찾는 관광객은 있어도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찾는 관람객은 없다. 심지어 ‘코로나19’로 인해 기념관은 지난 2월25일부터 관람이 불허됐고, 지난달 재개되는가 싶더니 다시금 ‘기약 없는 휴관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했지만, 정작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밀려났다.
 

25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이 6.25 납북 피해자들을 대리해 북한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 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0.06.25.[뉴시스]
25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앞에서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이 6.25 납북 피해자들을 대리해 북한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 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0.06.25.[뉴시스]

 

‘6·25전쟁 납북피해자’란, 북한의 기획 납북 의도에 따라 전시(1950.6.25~1953.07.27) 강제 납북된 10만 명의 ‘민간인’을 뜻한다. 그중에는 초대 경기도지사였던 구자옥 선생도 포함된다. 북한군에 의해 납북된 구 선생은 강계 근처에서 끝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70년이 지난 지금,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거의 없다. 남겨진 가족들만이 그들의 흔적을 좇고 있다.

법조단체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한변, 회장 김태훈)’은 25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6·25전쟁 납북피해자 가족들을 대리해 北 김정은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납북 피해자들 가운데 우리나라 초대 감찰위원장 겸 4대 국경일 노래 작사자인 정인보 선생,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의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 우리나라 등록 1호 홍재기 변호사, 서울지방법원 김윤찬 판사, 법무부 공무원 김명배, 기차 기관사 이남운 등의 가족들이 나섰다.

'한변'은 소장을 공개하며 “북한은 헌법상 주권면제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실체가 있는 단체로 볼 수 있다. 北 김정은은 북한의 최고 책임자로서 조부인 北 김일성 등의 손해배상 책임을 상속한 지위에 있기도 하다”며 “北 김정은을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 드문 소송사례가 되겠지만 법리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원고를 보며 연설하는 北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원고를 보며 연설하는 北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뉴시스]

 

北 김일성 “남조선 인테리 데려오라”…납북된 10만 명

北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발간한 ‘김일성전집4’에 따르면 北 김일성은 기습 남침 4년 전인 지난 1946년 7월31일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올데 대하여’라는 담화문에서 아래와 같이 발언한다. 北 김일성은 “…조선 건설에서 직면한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는 대학교원·학자를 비롯한 인테리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부족한 인테리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조선의 인테리들을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와야 한다”라고 지시했다. 전쟁 전부터 북한에 의한 ‘기획 납북(拉北)’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北 조선로동당 군사위원회는 전쟁 직후인 그해 6월28일, ‘남반부 정치·경제·사회계 주요 인사들을 포섭하고 재교양해 그들과 통일 전선을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군사위원회 8호 결정)을 채택한다. 6일 후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군사위원회 합동 연석회의에서 北 김일성은 ‘남한 인사 납치 작전명령’인 ‘모시기 공작’을 특별 지시했다. 이는 북한의 대남 공작 계획서인 ‘北 연천주재지보고서’와 미군 방첩대 등을 통해 확인됐다.
 

일요서울은 지난 1월 경기도 파주의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다녀왔다. [조주형 기자]
일요서울은 지난 1월 경기도 파주의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다녀왔다. [조주형 기자]

 

일요서울은 최근 정부를 통해 국무총리실에서 발간한 총 527쪽 분량의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조사보고서(11-1250468-000001-01, 이하 진상조사보고서)’를 입수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획 납북 유형은 3개 부류다. 북한은 ‘남침 정당화, 북한 체제 선전 및 남한 정부 고립화’를 위해 국회의원 등 사회저명인사를 제1부류(안재홍·엄항섭·조항구·김규식·윤기섭·김상덕·원세훈·조헌영·백상규·구덕환·최병주·유기수·남궁혁·구자옥 등)로, 전문가 등 북한 체제 운영에 활용 가능한 인사들을 제3부류로 선별했다.

하지만 제2부류인 경찰·공무원(장우섭·최홍식·성광현)·법조인(이주신·하진문 등)·학자(정인보·김동환·손진태·이갑수)·언론인(이길용) 등 우익인사는 북한 체제에 잠재적 위협 요소로 판단했다. 보고서는 납북 과정에서 극렬한 폭력 행위가 남녀노소 구분없이 자행됐다고 밝혔는데, 이들 중 일부는 불법 처형당했던 것으로 기록했다.

납북자는 무려 9만4121명에 달한다. 이는 ‘6·25사변피랍치자 명부·피랍치 인사 명부와 6·25동란으로 인한 피랍치자 명부·우리측안부탐지조회서’ 등 9종의 명부에 등재된 수치로, 진상조사위원회가 정리했다. 전체 납북자 가운데 서울과 경기도, 충북에서는 각각 2만3505명(25%), 1만7822명(18.9%), 1만3775명(14.6%)로 집계됐다. 특히 9만4121명 중 남성은 9만983명(96.1%)이었으며, 연령별로는 20대와 30대가 각각 5만3992명(57.4%), 1만8564(19.7%)로 가장 많았다. 북한군의 전쟁 수행에 따른 인력 부족과 남침 경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전체 납북자 가운데 84.4%인 7만9401명이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납북됐는데, 이는 北 김일성의 ‘모시기 공작’의 완전 이행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일요서울은 지난 1월 경기도 파주의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다녀왔다. [조주형 기자]
일요서울은 지난 1월 경기도 파주의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다녀왔다. [조주형 기자]


하지만 현재 이들 대다수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지금까지 북한의 기획납북 인정을 받아내지 못했다. 지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빠졌지만 20년 전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 제3항에 따라 적십자회담 등에서 논의를 했다. 정부는 그해 9월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를 북한으로 송환시켰지만 북한은 납북자들에 대해 “본인 의사에 반해 북측에 남은 사람들은 없다”며 거부했다. 보고서는 ‘납북·납북자’라는 용어가 아닌 ‘민간인들이 북쪽으로 휩쓸려갔다’는 등 우회적인 용어가 난무했음을 지적한다.

북한은 정전협정부터 ‘실향사민의 자유의사를 확인하는 중립기구의 설치’를 극구 반대했다. 결국 납북자 송환은 실패했고, ‘6·25전쟁 납북피해자’ 가족들은 생이별의 아픔을 또다시 느껴야만 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배지.[조주형 기자]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배지.[조주형 기자]

 

국군 귀환용사 유 씨 인터뷰 “정부, 왜 못 데려오나”

‘6·25전쟁 납북피해자’ 외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국군포로 송환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계속 유야무야(有耶無耶)됐다.

일요서울은 통일부를 통해 ‘2014 유엔 인권이사회 북한인권 조사위원회 보고서’를 입수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6·25전쟁 정전 당시 약 8만2000명의 한국군이 실종, 국군포로 5~7만 명이 북한 등에 억류됐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북한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한 사령관 펑더화이(팽덕회·彭德懷)는 회담에서 중국군이 참전해 한국 국군포로 4만 명을 데려갔다고 밝혔다’고 적혀 있다. 이어 보고서는 “정전의 즉각적 결과로 1953년 4월과 1954년 1월 사이 한국으로 송환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하다. 위원회는 최소 5만 명의 한국군포로가 본국 송환되지 않았다고 파악한다. 이들 중 약 500명의 생존자들이 북한에 억류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철조망.[뉴시스]
철조망.[뉴시스]

 

지난 1994년 故 조창호 중위의 귀환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년 국군포로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닌, 자력에 의해 탈북(脫北)해 국내로 귀환했다. 국내 귀환한 국군용사는 2014년 4월 기준 80명이지만 현재 약 20여 명만이 생존해 있다.

‘국군귀환용사회’의 장(長)인 유영복(90) 씨는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정전을 한 달 앞둔 지난 1953년 6월, 유 씨는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국군은 한 해 뒤인 1954년 9월 화랑무공훈장까지 수여하며 전사(戰死) 처리했다. 정작 북한으로 끌려간 국군포로들은 ‘북한 내무성 건설대원’ 등으로 혹독하게 핍박받았다. 이후 47년만인 지난 2000년 스스로 북한을 탈출해 그해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단장께 ‘유영복 9395049 전역을 신고합니다’라는 보고를 하는 순간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자는 그런 그를 지난해 9월6일 경기도 자택에서 만났다, 당시 그와 나눴던 일문일답을 소개한다.

국군 귀환 용사 유영복 씨.
국군 귀환 용사 유영복 씨. [조주형 기자]


- ‘국군 포로 귀환’ 문제를 두고 정부에서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는가.
▲ 처음에는 국가가 나서서 하겠다면서 북한에 요구했다. 지난 2000년 당시 우리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6·15 남북공동선언’ 당시 한국 대통령이 북한에 남겨진 국군 용사들에 대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솔직히 서신 교환만이라도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한 마디도 없으셨다. 우리나라 대통령조차 말씀이 없는데 누가 날 찾겠는가. 그래서 바로 탈북(脫北)했다. 그해 8월 우리나라에 와 생애 끝자락에 계신 아버지를 서울에서 만났고, 이후 북한의 가족들을 탈출시켰다. 정부의 협조를 통했다고 하긴 힘들다.

- 정부 태도를 두고 국군 귀환 용사들은 어떻게 보는가.
▲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니 해결은커녕 북한에 부담이 되는지 아예 말조차 없다. 앞선 정부에선 그나마 말이라도 했다. 지금까지 22명이 살아 있다며 주소까지 나왔는데 데려오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누구 하나 발 벗고 나서지도 못하고 있는 데다 국가와 국방부도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지금쯤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한 전우(戰友)들이 몇이나 남아 있겠나.

-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에 따르면 국군 포로가 수만 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던데.
▲ 내가 오기 전인 지난 1994년 故 조창호 중위가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고생해서 조국 땅을 밟았지만, 북한은 한 명도 없다고 왜곡했다. 그들은 우리들을 ‘해방 전사’라며 ‘내무성 건설대, 7xx, 8xx 부대’라는 위장명칭으로 광산에 500~600명씩 투입했다. 애초에 ‘포로’가 아니었고, 훗날 교환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공민(公民)’인 것처럼 위장했다. 교환 의도조차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포로’는 없는 것이다. 자진 월북(越北)했다고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 북한에서 간신히 연명하다가 조국으로 왔다. 대한민국에는 ‘자유(自由)’가 있어 지상낙원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일부 사람들이 북한 체제가 나쁜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하는데, 내가 살아본 바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북한 체제를 따라가려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나라의 명운은 하늘이 정한다는데, 더 떠들어봐야 뭐하겠는가. 그렇지 않소, 기자 양반?

국립6.25전쟁납북기념관 책자.[국립6.25전쟁납북기념관]
국립6.25전쟁납북기념관 책자.[국립6.25전쟁납북기념관]


6·25전쟁 70년…하지만 잊혀 가는 이들

총 18만 명에 달하는 ‘6·25전쟁 납북피해자’와 ‘국군포로’ 송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해 통일부는 25일 “(남북)협상이 불발이고,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게 없기 때문에 언제 (납북 피해자들이)올 수 있다는 말씀은 드릴 수가 없다”고 말했고, 국방부는 "통일부 등과 협조해 남북 대화 시 해결을 촉구하는 노력을 하고 있으나, 해결이 쉽지 않다"고 답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랫동안 천착해 온 국회의원 출신의 박선영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는 25일 서울 광화문에서 일요서울에 “정부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일갈했다. 그렇다면 현재 국회에서는 이를 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송갑석·박정·신경민·정재호·이훈·안규백·김병관·권칠승·박홍근·박광온·이수혁·심재권 의원은 지난 2018년 8월13일 ‘6·25전쟁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런데 “‘납북자’라는 표현은 북한 측에서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단어로, 실제 장관급 회담 등 실무회담에서는 ‘전쟁 시기와 그 이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 등의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면서 “‘납북자’의 표현을 ‘전시실종자’로 변경함으로써 법률상의 용어로 인한 남북관계에서의 충돌을 완화하기 위한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결국 이는 공분을 불러 일으켰고, 송 의원 등 12인은 개정안을 철회해야 했다.

그러다 지난해 심재철 미래통합당 전 의원 등 10인은 ‘6·25전쟁 납북피해자에 대한 피해보상’을 규정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발의했다. 70년간 납북피해에 따른 보상은 현행법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개정안은 혼란 속에서 임기만료로 폐기됐지만, 구자근 의원 등 10인이 지난 23일 ‘6·25전쟁 납북피해자에 대한 피해보상’ 안건을 제안하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편,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북한지역에서 발굴된 국군전사자 유해 147구가 미국을 거쳐 지난 24일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당연히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50여 년간 북한에서 고통 받았던 유 회장이 기자에게 언급했던 “정부가 전사(戰死)자 유해를 찾아오겠다는데, 왜 살아 있는 국군포로는 정작 1명도 나서서 데리고 오지 못하느냐”는 일침 또한 따갑기만 하다.
 

6.25전쟁 68주년인 25일 강원 홍천군 화촌면 풍천리 유해발굴 현장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원들이 발굴된 유해를 유골함에 넣어 이송하고 있다. 2018.06.25. [뉴시스]
6.25전쟁 68주년인 25일 강원 홍천군 화촌면 풍천리 유해발굴 현장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원들이 발굴된 유해를 유골함에 넣어 이송하고 있다. 2018.06.25.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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