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아웅산 폭탄테러 당시 현장, 쓰러진 기자. [뉴시스]
아웅산 폭탄테러 당시 현장, 쓰러진 기자. [뉴시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이범석 외무장관을 통해 우리의 북방정책 의지를 밝혔다

북방정책, 6공화국에서 구체화정치외교로 발전해 가는 시작

- 한국과 북한의 통일방안은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었고, 또 북한의 통일방안에는 북한이 최종적으로 거부권을 갖겠다는 의도가 강한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북한의 그러한 의도는 어디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

▲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북한이 군사적으로 우리보다 앞섰다고 이야기하지만, 인구 면에서 우선 3분의 1이다. 그러한 국력에서 오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등하게, 그리고 합의는 남북이 공히 합의하는 것만이 유효하다고 하는 원칙은 계속 흐른다. 소위 거부권이다. 그리고 북한은 통일을 일종의 전략 전술로 이용했다. 통일을 논의하는 데 어떻게 그런 전제조건이 있을 수 있나? “현 한국 정부는 물러가고, 연공 정부가 대체돼야 한다. 남한의 모든 반공법, 남한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해라. 미군은 철수해라” 하는 전제조건들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김일의 담화와 북한 사람들이 통일방안을 포함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다 정치학상의 도식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 1983년 당시 이범석 장관께서 국방대학교 연설 중에 ‘북방정책’이라는 표현을 언급하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한 구체적인 표현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달라.

▲ 1982년에 우리가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도 제의한다. 이 시기에 청와대 외교안보비서실에서 몇몇 학자를 포함해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연구를 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당시 고려대학교 한승주 교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외교안보실의 전문위원으로 작업을 했는데, 거기서 북방외교에 대한 앞으로의 지침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 우리 정부 내에서 북한 문제를 다루고, 공산권, 특히 소련‧중공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평양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직항 노선을 탈 필요 없고, 베이징이나 모스크바를 경유해 갈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래서 경유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강화해가는 것은 평양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생각들을 했다. 그게 북방정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1983년 6월29일에 6‧23선언 10주년을 기념해서 국방대학교에서 이범석 장관이 연설을 했다.

“1980년대 우리에게 최대 목표는 한반도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데 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외교가 풀어 나가야 할 최대 과제는 소련 및 중공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북방정책의 실현이다”라는 것이 연설의 핵심이었다. 이 연설문은 아까 말한 스터디그룹이 골자를 만들어서 이범석 장관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렇게 이범석 외무장관을 통해서 우리의 북방정책의 의지를 밝힌 것이다. 외무부 안에서 만들어져서 국방대학교 연설이 된 게 아니고 그 골격을 만드는 데는 아까 말씀드린 청와대 이장춘 비서관이 중심에 있었다.

- 그렇다면 그것이 이후 제6공화국 북방외교의 기초가 됐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그게 그대로 노태우 정부로 이어진 것이다.

- 과거 서독의 동방정책이 동구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의미한다면, 북방정책이라는 말에는 지금 말씀하신 중공, 소련을 통한 한반도 통일이라는 의미가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다.

▲ 그래서 북방정책이 제6공화국에서 구체화된다. 그게 소련과의 수교, 중공, 지금의 중국하고의 수교로 연결이 된다. 그리고 물론 동유럽과의 관계 개선은 꾸준히 해오고, 6‧23선언 이후에 통상을 해 왔지만, 이것이 정치‧외교로 발전해 가는 시작이 된 것이다.

-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요. 이범석 장관께서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타계하시는데, 우리의 남북대화 제안에 대해서 그 당시의 북한은 아주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거부하는 건 물론이고 도발까지 하지 않았는가.

▲ 아웅산 테러 사건은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해외 순방하는 도중 일어난 사건이다. 말씀드린 1981년에는 미국과 아세안 국가, 그리고 1982년에는 아프리카를 순방한다. 아프리카는 아시다시피 제3세계 아닌가.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의 자원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때다. 물론 나이지리아 같은 곳은 석유가 개발돼서 굉장히 주목받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깊숙이 개입을 하지 않은 단계였으니까, 개척자 정신에서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첫 순방했다. 1982년 아프리카에 이어서 서남아시아 방문을 계획하는데, 집권 제3년차 이후 계획을 입안하는 단계에서 중립외교를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제1차 순방할 곳으로 생각한 국가는 인도였다. 왜냐하면 비동맹 세계 맹주가 인도였다. 인도네시아도 물론 아크멧 수카르노 때문에 한쪽의 커다란 거점이었지만, 우리가 이미 인도네시아는 커버했다. 그래서 남은 것이 인도였으니까 인도를 커버한 다음에 우리의 전통 우방인 호주‧뉴질랜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범석 장관이 호주‧뉴질랜드‧인도 안을 가지고 청와대에 다녀오면서 “버마를 넣어야 한다”고 했다. “왜 갑자기 버마냐?” 물었더니 “대통령께서 정주영 씨를 면담하셨는데, 정주영 씨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대통령께서 버마에 준비한 프로젝트가 있으니까 가보시겠다 한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그렇다면 “버마를 가시게 되면 스리랑카를 넣읍시다. 같은 비동맹이니까”라고 했다. 스리랑카가 비동맹에서도 상당한 활동을 하고 있고, 버마‧인도‧스리랑카‧호주‧뉴질랜드, 그리고 오는 길에 괌 등에 들른다든가, 중간 기착점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래서 6월에는 버마‧인도‧스리랑카‧호주‧뉴질랜드‧홍콩. 그러다가 7월에 가서는 홍콩 대신에 마지막 기착지를 괌으로 했다. 9월에 막상 떠날 때는 브루나이가 포함됐다. 저는 7월에 브라질로 부임했으니, 9월 최종단계 때는 아마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 큰 프로젝트라고 하면 버마나 그 아래 지역에서 원유가 나온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지금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래서 원유 개발과 관련이 있었나 하고 막연히 생각을 했었는데, 최근에 당시 버마에서 근무했던 임성준 대사에게서 들었죠. 임성준 대사가 아웅산 테러 사건 때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사건이 터지자마자 곧 투입돼서 그 자리에서 근무를 했다. 당시 현대가 관여했던 프로젝트가 뭔가 물었더니, 킨다댐 사업이다. 만델레이에서 남동쪽으로 110km 떨어진 판라웅 리버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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