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2018년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중국응원단이 중국 국기를 흔들고 있다. [뉴시스]
‘2018년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중국응원단이 중국 국기를 흔들고 있다. [뉴시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훈련이 아닌 실제상황이라는 방송까지 나와 많은 사람 놀랐다

“6차에 걸친 협상 끝에 국명 호칭은 ‘Korea, Both sides’ 사용

- 1981년부터 1983년까지가 우리 외교에 있어서 파란만장한 해였던 것 같다. 우방국 외교, 제3세계 외교, 대북정책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면서, 또 한편 북한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터졌다. 그래서 생각했던 이상으로 우리한테도 비용이 있었던 것 같다. 아웅산 테러 사건에 앞서 1983년 5월에는 중공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 있었다. 당시에는 우리가 중공과 외교관계가 없었는데, 그 사건이 관계를 여는 계기가 됐다고 하는 평가도 있다. 이에 대해 말씀해 달라.

▲ 중공 민항기 불시착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공식‧비공식이건 간에 왕래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의의가 있다. 이 사건은 5월5일 어린이날에 났는데, 휴무라서 친구들하고 같이 골프를 갔다. 골프를 끝내고 시내 들어오니까 한 3시 반쯤 됐다. 아침 일찍 18홀 하고 나서 서울에 올라왔는데, 집에 가니까 아무도 없어서 사무실에 들렀다. 그랬더니 “큰일 났습니다. 사이렌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하는 거다. 중공기가 불시착해서 비상이 걸리고 백방으로 나를 찾았다는 거다. “지금 청와대로 올라가십시오. 곧 회의가 소집이 돼서 열립니다”라고 했다. 아마 한 4시 반쯤이었던 것 같다.

청와대 비서실장실에 가서 회의에 참석을 했는데, 휴일이니까 복장도 점퍼 차림이었다. 그랬더니 선양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국 민항기가 납치돼서 한국에 불시착을 했다고 한다. 불시착한 곳은 춘천의 미군기지였다. 이 비행장은 작은 군용비행장으로, 조그만 정찰 비행기들이 착륙하는 곳인데, 활주로를 벗어나서 그 끄트머리에 비행기가 멈춰 있었다. 96명의 승객이 탔는데, 승무원은 9명이고 영국제 트라이덴트라고 하는 제트다. 6명의 납치범들이 비행기를 장악해서 타이완으로 가자고 하다가, 연료가 모자라서 착륙하게 된 거다.

한국전쟁 때 북한 지원차 중공군이 개입했기 때문에 1950년 말부터 1953년 휴전할 때까지 한국전쟁의 주적은 중공군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싸운 적국이다. 그 후에 외교관계도 물론 없었다. 우리 군과 UN군이 압록강, 두만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물론 국가로서 서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상태였다. 납치된 비행기가 한국에 불시착했다는 이야기가 일반에게 공개된 건 5시10분이다. 국방부 대변인이 발표를 한다. 그런데 서울 시내에 2시쯤에 경보가 났고, 훈련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는 방송까지 나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대통령비서실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장세동 경호실장이 중국 민항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텔렉스를 가져왔다. 수취인이 우리 교통부 항공국장이다. 항공국장도 물론 거기 와 있었는데, 이름이 명시돼 왔다. 어떻게 이 사람을 알게 됐냐고 했더니, 캐나다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회의에서 명함을 서로 교환한 적이 있다는 거다. 그 명함을 보고 온 거다. 내용은 사건 해결을 위해서 한국 방문을 허용해 달라는 전보였다. 그래서 자기들은 다음 날 아침 8시에 베이징공항을 출발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보내왔는데, 저희들이 내부 검토를 하기 위해서 다음 날 6일 이른 오후로 출발을 연기하라고 이야기했다.

6일 11시15분 우리 정부가 “항공기 승객, 승무원은 항공기 테러방지 협정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발표한다. 국제법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한 거다. 그리고 전날 받은 중국 측 텔렉스에 대한 우리의 첫 회신을 보냈는데, 김포의 기상이 좋지 않으므로 출발을 7일로 연기해 달라, 그리고 중국 측 대표단에는 고위 외교 관계자를 포함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랬더니 6일 저녁 6시에 한국에 협상 대표 9명을 포함한 33명의 입국을 요청하고 명단을 보내왔다. 그리고 단장으로는 션투 등 33명이 베이징에서부터 B707로 김포에 들어온다. 5월7일 12시30분에 도착해서 오후 2시부터 협상을 시작한다.

그때 제가 제1차관보로서 지시를 받아 한국 측 수석대표로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 입장은 항공기 불법납치 억제를 위한 협약, 하이재킹 방지 조약 등 항공 관계 국제협약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했다. 중국도 이 두 협정의 가맹국이다. 이러한 우리의 기본 입장을 밝힌 데에 대해서 중국 측은 사의를 표명하고 모든 조치가 원만히 처리되기를 희망한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5월7일 12시 반에 도착했으니까 다음 날 5월 8일 오전, 오후 두 차례 협상을 한다.

협상이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납치된 승객과 승무원은 보내면 된다. 다만 납치범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중국 측은 그 납치범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중국 측에서 처리를 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우리는 승객‧승무원‧기체만 송환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항법사가 총상을 입어 국군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서 션투와 중국 측 사람들은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국군병원으로 갔고, 이후 오후 2시부터 회의를 했다. 중국 측은 납치범을 전부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우리는 “국제 관례에 따라서 납치범에 대한 재판 관할권을 행사하겠다”고 했다.

그다음에 송환 관련 문서인 인수 인도서를 만들어야 되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실무 인수회의가 난항을 겪었는데, 양국의 국명, 호칭 문제,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서명하는 대표의 타이틀 표기가 문제가 된 거다. 우리 한국 측은 대한민국이라고 쓰고,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써서 문서를 만들자고 했더니, 중국 측은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자고 했다. 양쪽 국호는 사용하지 않고 서로 알 수 있는 방법을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래서 제가 “남의 집 안방에 구두 신고 들어와서는 그 주인한테 제대로 인사도 안 하겠다는 이야기냐”고 비유를 하기도 했다.

서명하는 방법은 우리가 조약이나 협정에 쓰는 방법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서 외무부 제1차관보 아무개가 서명을 하고, 중국 측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대표해서 민항총국장 션투라고 양쪽 서명할 사람들의 타이틀을 기재하자고 했다. 그런데 한사코 못하겠다고 그러다가 5월10일, 7일에 첫 회의를 하고 나서부터 3일이 지나서야 타결이 된다. 6차에 걸친 협상 끝에 국명 호칭은 한국과 양측, ‘Korea, Both sides’를 사용하기로 하고, 서명 대표 표기만은 대한민국 외무부 제1차관보, 중국인민공화국 민항총국장으로, 말하자면 국명은 양보하고 서브타이틀은 우리 주장대로 서명하기로 한 거다.

이와 관련해서 이야기가 있는데, 전두환 대통령께서 “그거 잘됐다. 우리가 초청이라도 해야 할 상대가 아니냐. 그러니까 6.23선언의 정신에 따라서 공산권과의 관계를 갖겠다고 하는 정부 입장에서 봐도 중국과의 접촉이 바람직하다. 온 김에 우리 공업시설 시찰도 시켜주고, 한국을 많이 보여줘라”고 했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 협상하고 있는 동안에 승객들은 버스 타고 수원 일대 우리 산업단지를 시찰했다. 삼성에 가면 삼성 라디오를 선물했다. 한국 사람들 인심이 후하지 않은가. 그다음에 면직 공장을 방문해서 메리야스나 내복을 잔뜩 선물받아 돌아갈 때 한 보따리 가지고 갔다. 이 사람들은 워커힐호텔에 머물렀는데, 중국 음식을 먹을 거 아니겠는가? 그 중국 요리에 샥스핀도 나왔다. 그때 우리 신문들은 옛 적국인데 이렇게 호화로운 대접을 한다고 저자세 외교라고 비판하는 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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