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고형익을 죽이지 않는다면 아마도 울화통이 터져 내가 죽고 말 것이다. 내 인생에 그 녀석이 걸림돌이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 녀석은 좋은 가정환경을 무기로 반장 자리를 독식했다. 녀석의 어머니가 학기 초에 밍크코트를 휘날리며 다녀가면 영락없이 다음 날 반장 지명이 있었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반장은 임명제였다) 나는 처음에 무능력한 우리 아버지와 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잘못 맞추어진 시위였다. 나는 철이 들면서 대부분의 가정이 나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유별난 것은 형익의 어머니도 아니고 바로 형익 자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녀석은 나를 자기의 똘마니로 점찍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그것이 호의인 줄 알았다. 처음부터 녀석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속았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류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악연이 무섭다더니 정말 그랬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도 같이 나왔다. 떨어져 있었던 것은 내가 재수하던 한 해 정도였다.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 무모하게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의 영문학과에 원서를 들이밀었고 미달이 될 것이라는 녀석의 말과는 달리 2.5대1이라는 학교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경쟁률을 보고 면접마저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녀석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신촌에 있는 명문대에 떡하니 들어갔다. 

나로서는 그 재수 기간이 더 좋았던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얼마나 바보처럼 녀석에게 이용당했다는지 알게 되었다. 
녀석이 못하는 과목을 난 더 열심히 공부해서 설명해 주었고 내가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를 빌려주는 것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녀석은 그것이 당연한 자신의 권리인 양 챙겼고 난 그것을 숭고한 우정의 발로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 녀석은 대학생이 되었고 난 재수생이 되고 만 것이다. 녀석은 이미 내가 자신의 최대의 경쟁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소설을 썼을 때 녀석이 읽어보고는 문장이 거칠다고 출품을 만류했다. 그리고 청소년 문학상 발표 날 나는 대상에 녀석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재수 생활 동안 내내 녀석에게 고통 받은 나의 과거를 곱씹었다. 

그 때문에 녀석과 같은 행정학과를 간 것은 결코 내가 이 땅의 정치나 관리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받은 것만큼 녀석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또 얼마나 오판이었던가. 녀석은 나보다 1년 먼저 출발한 만큼의 이점을 갖고 있었다.

나는 다른 길에서 녀석을 앞질러야 했다. 하지만 같은 코스로 들어와 버렸고 난 두 배의 노력을 해야 녀석을 잡을 수 있었다. 녀석이 행정고시에 최연소자로 합격했을 때 난 아직 2학년이었다. 더구나 녀석은 2대 독자여서 군대도 6개월짜리 방위로 마쳤다. 하지만 난 꼬박 30개월을 채워야 했다. 군사학 시간에 땡땡이를 친 덕분에 권총을 찼었기 때문이다.

내가 군에서 돌아오자 녀석은 외무고시에 붙어 있었다. 녀석은 내친김에 사법고시도 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 그것뿐이었다면 나도 녀석은 내 사정권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은 내 애인마저 가로채고 있었다. 면회가 끊어지고 편지마저 끊긴 내 애인 진초희가 녀석과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게 안 들키려고 무진 애를 쓴 모양이었지만 내게도 고형익 이외의 친구가 있었다. 전해 주는 말을 듣고 난 불같이 화가 났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까지는 참기로 했다. 그러나 녀석을 끈질기게 미행한 끝에 결국 영동의 그럴듯한 호텔로 둘이 들어가는 현장을 목격했다. 난 이제는 정말 더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녀석을 죽이고야 말리라.

난 서서히 준비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작은 오피스텔을 하나 얻었다. 그곳에 아주 간단한 형태의 사무실을 차렸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컴퓨터 한 대가 다였다. 난 주위에다가 기획 사무실을 하나 차리려고 한다는 소문을 냈다. 

책상 서랍엔 독일제의 날카로운 칼을 하나 넣어두었다. 그리고 은근히 형익이를 그곳으로 불렀다. 난 쓸데없는 말을 계속 주절거리며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하지만 그날은 결국 녀석을 찌르지 못했다. 나는 100m 달리기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처럼 긴장해 있었지만, 돌발적인 힘을 줄 총성이 없었다. 난 그 칼을 움켜쥐고 달려드는 상상만을 거푸 했을 뿐이었다. 신호가 될 무엇이 필요했다.

그날도 ‘신호가 될 무엇’을 찾아 헤매다가 뻐꾸기시계를 보았다. 바로 저기다. 저것이 울리는 걸 신호로 삼아 칼을 뽑으리라. 나는 당장 그놈을 사 들고 왔다. 책상 뒤쪽 벽에 그 시계를 걸었다. 난 당장 그날 고형익을 불렀다. 녀석은 물색 모르고 또 내게로 왔다. 난 말을 돌리다가 7시 50분이 되었을 때 녀석을 책상 쪽으로 밀어붙이고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녀석은 돌변한 나의 태도에 기겁했다. 나는 서랍 속으로 손을 들이밀어 칼을 만지작 거리며 더욱 신명이 올라 소리쳤다.

그때였다. 녀석의 머리 위에서 사행 집행관인 뻐꾸기가 나와서 정각 8시를 알렸다. 정확하게 뻐꾸기 소리가 세 번째 울릴 때 내 칼은 녀석의 심장을 찌르고 다시 녀석의 배, 머리를 난자했다. 온 사무실이 피바다가 되었다. 난 다음에 여유 있게 뒷마무리를 했다.

먼저 바닥의 피를 물을 부어 깨끗이 지웠다. 천장과 벽에 튄 피는 미리 준비한 도배지로 새로 도배를 해서 묻어버렸다. 책상은 페인트를 부어 새로 칠했고 열심히 닦았다. 컴퓨터와 시체는 내 차로 끌고 갔다. 녀석의 시체는 한강 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컴퓨터는 뒷골목에 버렸다.

죄의 흔적은 하나도 남김없이 지워진 것이다. 그러나 실수가 있었다. 그 망할 영감 추 경감만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런 곳에 피가, 혈흔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사자인 나만 몰랐으니까. 
천려일실이라 했던가. 더구나 나는 형익이 녀석이 사실은 나와 진초희를 다시 결합해 주려고 만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초희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너무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겐 지금도 뻐꾸기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퀴즈. 혈흔이 남아 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답변-3단] 피는 정각 8시를 알리기 위해 튀어나온 뻐꾸기에 묻어 있었다. 피를 닦아낼 때 뻐꾸기는 시계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범인은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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