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6·25 전쟁 7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6·25 기념행사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 이후 10년 만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25 50주년 기념행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6·25 행사 때마다 거행돼 오던 전투재연과 시가행진도 취소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4억5천만 달러를 몰래 찔러주는 등 남북정상회담에 매달렸던 김대중의 김정일 비위맞추기 일환이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올 6·25 전쟁 기념식에 참석, 북을 향해 날 선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남북 간 체제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며 6·25 전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킬 힘을 길렀다⋯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민주주의 정신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고 역설했다.

또 “우리는 두 번 다시 한 뼘의 영토, 영해, 영공도 침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 맨주먹 붉은 피로’의 가사가 담긴 ‘6·25의 노래‘도 합창했다. 이승만 대통령처럼 강렬한 반공 결기가 뿜어 나오는 듯했고 든든해 보였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보수적 ‘반공’ 수사는 얼마 전 자신을 ‘겁먹은 개’ ‘못된 짓 못 본체하는 놈’ 등 욕설을 퍼붓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북한 도발에 대한 분노 표출일 수 있다. 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선언해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기망사술(欺罔詐術)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다.

북한은 6·25 기습남침 때부터 기망해 왔다.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침 18일전인 1950년 6월7일 남한에 호소문을 보냈다. 이 호소문은 남북한 통합 최고입법기관(국회)을 설립하기 위해 8월5~8일 사이 남북 총선을 실시하고 8월15일 서울에서 국회를 소집하자고 했다.

또 북한은 남침 6일 전인 6월1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와 남한 국회를 통합하자는 호소문도 보냈다. 6·25 기습남침을 며칠 앞두고 남한을 안심시켜 무방비 상태로 기습 남침하기 위한 기망책동이었다.

북의 기망사술을 간파하지 못한 이승만 정부는 38선을 지키는 한국군을 휴가 보냈고 서울 육군본부 장교클럽에선 고위 군 간부들이 6.25 전날 밤 파티를 열고 술에 취해 잠들었다. 다음 날 새벽 4시 북한의 남침은 자행됐고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기망사술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도 드러났다. 7·4 공동성명은 평화통일 3대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명시했다. 이 셋 중 ‘자주’는 김일성 북한 수상의 요구에 의해 삽입되었다. 외부간섭 없이 자주 통일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은 후에 ‘자주’가 주한미군 철수를 의미했다고 딴말 했다. 7·4 공동선명도 김일성의 사술에 당한 것이다. 북한은 그 뒤에도 1994년부터 미국과 또는 5개국들과 비핵화를 여러 차례 합의하거나 선언했다.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 합의·선언 대가로 핵을 개발할 시간을 벌며 경제지원만 챙긴 뒤 비핵화 검증단계에 들어가서는 합의를 깨버리곤 했다.

김정은도 김일성·정일의 기만사술 유전자(DNA)를 타고났고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속였다. 김은 각기 문재인과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선언해주고 한·미 양국의 대북제재를 완전 해제하려 했다.

김은 북한의 낡은 핵시설 일부를 해체해 주는 대가로 미국과 한국으로 부터 대북제재를 전면 해제코자 했다. 그리고 핵 보유국 으로 묵인 받고자 했다. 김씨 왕조가 한국과 미국을 3대째 속인 것이다. 70년에 걸친 김씨 일가의 기망사술이 문재인과 트럼프에 이르러 차단될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들도 속아 넘어갈 건지 지켜보고자 한다. 그러나 문재인·트럼프도 기망당할 것 같아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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