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외교부 청사에 걸린 초대형 현수막 '대한민국 100년의 꿈'[뉴시스]
외교부 청사에 걸린 초대형 현수막 '대한민국 100년의 꿈'[뉴시스]

 

[일요서울ㅣ정재호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한국 사람들 생활력 강해 브라질 의복 상권 쥐어”

미국외교협회 소책자 “한국 민주화, 새로운 발전에 토대될 것”

- 장관님께서는 1983년 7월부터 3년 3개월 정도 브라질대사로 부임을 하셨다. 브라질에 계시면서 특별히 기억나시는 일이 있으면 이에 대해 말씀해 달라.

▲ 울리세스 기마라에스 브라질 하원의장, 헌법상으로는 대통령, 부통령 다음의 승계 순위에 있는 거물 정치인이다. 그 기마라에스 하원의장을 한국에 초청했다. 저는 민항기 사건을 치르고 나서, 주 베트남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대사 후임으로 브라질에 부임을 했는데, 당시 브라질하고 우리의 관계가 냉랭했다. 보통 우호협력 관계에 있으면 외무부 장관의 왕래도 있고 한데, 외무부장관이 온 일도 없고 또 우리가 간 일도 없다. 

1963~1964년에 우리나라에 브라질 이민이 시작됐다. 그런데 브라질 쪽에서는 농업 이민자를 원했다. 그래서 농업 이민 자격으로 갔는데, 이 이민자들은 주로 동대문·남대문에서 상업을 하던, 북한에서 월남했던 피난민들이나 퇴역 장교들 같은 지식층이었다. 전수농업 이민자는 당시 브라질리아에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만 전업 농업인이고, 나머지 분들은 아니었다. 1960년대에만 해도 우리 사회에 고등유민이 많을 때다. 대학 졸업생들이 서독 광부로 가고 그럴 때다. 그래서 이분들이 가서 6개월 이내에 다 농장에서 도망 나와서 상파울로, 도시로 집결했다. 브라질 정부의 입장에는 자기들이 의도했던 농업 이민하고는 많이 다르니까, 한국 이민자 수용을 잠시 멈췄다.

그렇다고 브라질 쪽에서도 그 사람들을 강제로 농장에 집어넣을 수 없는 거고, 이 사람들이 또 생활력이 강해서 제가 갔을 때만 해도 벌써 이미 브라질에서 의복 상권을 쥐고 있었다. 그 전에는 유태계 유럽 이민자들이 가지고 있던 건데, 옷 만드는 데 종사해서 다들 성공을 했다. 그럼 전에 한국에서 옷을 만들던 사람들인가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은데, 한국 사람들이 그만큼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있다. 그 부인들이 파리에 가서 오트 쿠튀르하는 것을 보고 카피해서 팔았는데, 그곳 시장을 석권했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남미까지 석권했다. 그래서 남미의 아르헨티나·칠레에서까지 상파울로로 옷을 사려고 오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까 브라질 정부로서는 상당히 불만이 많았다. 한국 정부는 그때 농업 이민을 보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고생을 많이 했다. 대사들이 정부에 건의도 많이 하고, 농기구도 정부 자금으로 지원했다. 비싼 농업기계들이 다 녹슬어서 방치된 상태였다. 그래서 제가 정부의 허가를 얻어 농기구를 처분하러 갔다. 그렇게 냉랭한 관계를 타개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결국 기마라에스 의장을 국회 초청으로 한국에 초대하기로 한 거다. 그래서 기마라에스 의장이 1985년 12월에 방한을 했는데, 14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왔다. 주로 대통령을 만나 뵙고, 국회 인사도 만났다.

그리고 건국대학교에 이야기해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마침 건국대학교 권영찬 총장이 저와 육사에 같이 있던 분이라 그 이야기를 해서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을 성대히 치러주고, 정부에서는 12월20일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그렇게 요인들의 내왕이 처음으로 트이고, 우리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이 브라질에 방문했다. 그런 일들이 브라질에서 기억할만한 외교적인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 외교에서 브라질 내지 남미는 아주 먼 나라였던 거 같다.

▲ 콜롬비아는 한국전쟁 참전 16개국 중 한 나라이기도 했다. 또 우리가 1960~1970년에는 계속 남미에 대해서 상당히 집중적인 외교를 했다. UN에서의 표밭이 남미였기 때문이다. 중남미에서 스물 몇 개의 나라가 있다. 그중에서도 브라질은 남북관계에서 항상 중립적인 묘한 위치에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도 그랬지만, 상당히 독자적·독립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여파로 한국 문제 토의에서도 브라질의 투표 성향은 항상 중립적이었다. 그러한 성향이 자연히 정계, 정부에도 널리 전파되었고, 그래서 비교적 냉랭한 관계에 있었다.

 

- 이후 1986년 10월에 주뉴욕총영사로 부임을 하셨다. 1990년 1월까지 3년 이상 계셨는데, 당시 국내 상황으로는 제6공화국으로의 정권 교체가 있었고, 단군 이래 최대로 경제가 활성화되는 시기인 반면, 정치적으로는 국내에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진 때였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상당히 의미가 있었을 것 같은데, 장관님께서 기억하고 계신 일화가 있으시면 소개해 달라.

▲ 대단히 미묘한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우리가 수세적인 입장에 있었는데, 매일 TV에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시위 상황이 나오고, 중세 무사 같은 장비를 입은 경찰관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전투경찰이라고 했는데, 요샌 기동대라 부른다. 그런 광경이 매일 나오는 상황이어서 한국의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뉴욕에서 미국의 여론 조사기관, 외교정책을 다루는 외교협회, 뉴욕에 본부가 있는 미국외교협회, 아시아 소사이어티, 코리아 소사이어티 등 우리와 관련 있는 기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7년, 제5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으로 넘어가는 시기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그렇게 직선제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어느 쪽으로 갈지 기로에 선 상황이었다. 미국도 한국의 포스트 전두환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 상당히 의구심이랄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외교협회가 한국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연구진을 구성했다. 미국외교협회의 스터디시리즈로 이 사람들이 쓴 소책자 Korea at the Crossroads 인쇄물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정치적인 취약성은 경제 및 안보상에서 커다란 위협요소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런 사태가 전반적인 한·미 관계를 압박했다. 같은 이유로서 민주화를 통할 경우 사회의 불복종 등 여러 가지 규율이 다소 산만해질 수 있겠지만, 동시에 이것이 역작용을 하여 새로운 창조적인 활동도 유발할 것이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강화되는 것은 한국의 경제를 개척하고 안보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런 면에서 한·미 관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은 있으나 현명하게 대처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민주화 발전 또는 경제발전, 안보의 지위 향상 등으로 한국이 장래 생산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한국 민주화가 가져올 여러 부작용도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발전에 토대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이 미국의 더 튼튼한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보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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