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인 3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88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 2018 손기정 평화 마라톤대회에서 5km 참가자들이 질주 하고 있다. 2018.10.03.[뉴시스]
개천절인 3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88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 2018 손기정 평화 마라톤대회에서 5km 참가자들이 질주 하고 있다. 2018.10.03.[뉴시스]

 

[일요서울ㅣ정재호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정주영 회장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확 바꿨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처음으로 세계가 함께하게 됐다”

- 올림픽 유치에 대해 여쭤보겠다. 당시에 한국의 경제력은 1인당 GNP가 약 2,000달러, GDP 역시 세계 40위권 밖이었다. 게다가 1981년 9월에 올림픽 유치가 정해졌다고 하는데, 1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쿠데타 등으로 정치적 후진국이라는 이미지, 남북 간의 적대관계 등 올림픽 유치에 불리한 점이 많았다. 그러한 점들을 극복하고 서울이 올림픽 유치지로 결정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는지 말씀해 달라

▲ 올림픽 유치 초기의 결정적 역할은 외무부가 했다. 1981년 초에 제가 정무 차관보로 왔을 때, 2월에 전상진 대사가 저를 찾아왔다. 전상진 대사는 대한 체육회 국제관계담당 부회장이었는데, 1988년 올림픽 유치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올림픽을 합니까” 하고 저는 처음부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전상진 대사의 설명이 우리가 유치하겠다고 국제적인 공약을 해놓고 그 후에 그만한 자금을 충당할 힘이 없으니까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정부와 체육계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거다. 

경위인즉 1979년 9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10·26사건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88올림픽 유치를 재가했다. 우리가 그전 해에 태릉에서 국제사격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박종규 전 경호실장이 대한사격연맹 회장인데 세계사격대회를 유치했고, 굉장히 성공리에 끝나고 나서 그분이 중심이 되어서 올림픽을 유치하자는 운동을 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도 좋다고 결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1979년 10월에 서울시장이 88올림픽 유치를 공언한다. 그러다가 10·26이 난 거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유보상태에 있었는데, 1980년 11월까지는 유치 의사 결정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계속 유치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그때 전두환 대통령이 새로 대통령이 됐을 땐데, 1980년 11월에 그 확인서에 서명을 했다. 한 30~40도로 뻗쳐올라가는 ‘전두환’이라고 서명한 사본을 저도 봤다. 

이렇게 IOC에 확인서를 제출하고 우리가 정식으로 유치 의사를 표명한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거다. 내가 “무슨 우리 주제에 올림픽입니까” 그랬더니 전상진 대사가 “내가 지금 방금 김포공항에서 세계육상연맹 회장을 배웅을 하고 오는 길인데, 그 사람들 이야기가 너희 한국은 지금 시설 한두 개만 더하면 올림픽 치르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했다. 우리가 1986년에 아시안 게임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동안에 서울시가 무슨 시설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올림픽 종목에 들어 있는 한 두서너 개만 더 건설하면 완전하다는 거다.

그런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전상진 대사를 모시고 김동휘 차관 방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니, 김동휘 차관도 “그거 안 되겠는데”라고 하면서 함께 장관실로 갔다. 바로 장관에게 설명했더니 똑같은 의견들이라, 지금 어떻게 철회를 할 수도 없으니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러한 여건이 할 만도 하다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노신영 장관이 남덕우 총리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관계 장관 회의를 해서 결정을 내야겠다고 했고, 총리도 동의해서 다음 날에 총리실에서 관계 부처 회의가 있었다.

거기에는 대한체육회 회장, 서울시장, 청와대 비서실장, 유학성 안기부장, 그리고 관계 부처들이 참석 했다. 그래서 회의를 하는데 돈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신병현 부총리가 “우리가 올림픽 치르려면 22억 달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했다. 그때 우리나라 IOC위원이 한 분 계셨는데 한일합섬 회장의 형이 되는 김택수 IOC위원이 “지금 우리가 나고야와 경쟁을 해야 하는데 IOC위원 투표해 봐야 우리한테는 2표밖에 안 나온다. 내 손에 장을 지져라. 내 표하고 북한에 있는 IOC위원 장웅, 그 두 사람밖에 지금 나올 게 없다”고 하는 바람에 그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정주영 회장이 자기가 대한체육회 회장으로서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그러면 서울 지하철 공사를 안 할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에 신병현 부총리가 “지하철 공사 해야죠”라고 답했고, 정주영 회장이 그 말을 듣고 22억 달러라고 하는데 순 체육회 기금으로 필요한 것은 6억 달러이고, 나머지는 인프라 투자가 16억 달러라고 하는 거다. 올림픽 경기 자체를 위한 비용이 6억 달러라고 하니까 이야기가 달라진 거다. 그래서 “이러지 말고 이건 대통령이 공약한 일인데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돌아서느냐” 하는 생각에, 결국은 분위기가 돌아섰다. 그때 저는 처음 정주영 회장을 봤는데, 그 동생인 정인영씨는 1962년 워싱턴에서부터 알고, 현대의 대외 활동은 그 정인영 부회장이 하고 있어서 정주영 씨는 명목상의 지도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분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확 바꿨다.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재외공관에 전보를 치고 유치 활동을 시작했다. 주재국 IOC위원들과 접촉해서 특히 라틴아메리카·아시아·중동·아프리카 IOC위원들에게 한국에서 개최하는 올림픽의 의의를 설명했다. “1945년 이후에 신생독립국으로서 올림픽을 하는 건 한국이 처음이다. 나머지는 전부 소위 선진국들이 해오는 게임이었다. 지금 신생독립국에서 한번 해보는 데 지원해 달라”고 어필했다. 그게 주효했다. 그래서 결국 IOC위원 82명 가운데 독일 바덴바덴에서 투표를 하고 52대 30으로 이겼다. 마지막에 바덴바덴에서는 우리 각 기업, KAL·현대·삼성 등이 전부 나섰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조중훈 KAL회장이 한복을 입은 스튜어디스들을 동원해서 코리안 부스에 배치하고, 또 당시 프랑스 에어버스사와 같이 각 기업이 각별한 관계가 있던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1981년 바덴바덴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 

88서울올림픽 이전의 두 올림픽은 세계가 분단된 상황에서 치른 게임이었다. 모스크바 올림픽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반대하는 서방 세계가 보이콧을 했고, 1984년 LA올림픽은 그 보이콧을 당한 공산권이 보이콧했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처음으로 세계가 함께하게 된 거다. 그래서 노래에 나오듯이 손에 손을 잡고 하는 의미가 있었던 거다. 88서울올림픽으로써 한국이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 일설에 따르면 세지마 씨가 올림픽 유치 건에 대해서도 한국 측에 아이디어를 제공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일본이 나고야 유치에 나섰는데, 일본의 일부 영향력을 가진 분들이 한국을 암암리에 지원했었다는 설이 있는데 말씀해 달라 

▲ 세지마 씨 이야기는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많이 이야기를 했다. 도쿄올림픽이 전후에 전쟁에 패하고 부흥한 새로운 일본을 보여주는 하나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고, 사실 저도 눈으로 봤는데,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일본 도쿄의 인프라가 굉장히 발전했다. 그전엔 하네다에서 도쿄 시내에 들어가려면 시궁창 냄새가 아주 심했다. 고속도로도 없고 국도 교통체증도 대단했다. 그런데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수도고속도로가 생기고, 복개 공사를 해서 하네다 근처의 시궁창 냄새가 자취를 감췄다. 올림픽이라는 것이 커다란 획기적인 선을 긋는다는 이야기들은 확실히 많이 했다. 개연성으로서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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