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그리워하는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뉴시스]
레닌 그리워하는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뉴시스]

 

[일요서울ㅣ정재호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노태우 대통령 “연내에 모스크바 구경시켜 달라”

이범석 장관 “북방정책은 남북 관계 개선하는 계기 될 것”

- 장관님 경력 중에 한·소 수교에 관한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북방정책이라고 하면 흔히 “중국·소련을 끼고 돌아서 북한 평양으로 가겠다”는 발상으로 독일의 동방정책을 빗대서 하는 말이라고 알려졌다. 제6공화국 당시 한·소 수교가 북방정책의 맥락에서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

▲ 물론 한·소 수교는 우리의 북방정책에 있어서 에베레스트산처럼 큰 의의가 있다. 북방외교의 시작에 대해 어떤 분들은 “7·7선언이 북방외교의 신호탄이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 외교의 흐름으로 봤을 때는 역시 1973년 6·23선언을 북방외교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6·23선언의 요체는 우리가 모든 나라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선언이다. 동시에 그때도 분명히 “우리나라와 적대적인 생각이 없는 국가와는 관계를 갖겠다”라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역시 저는 6·23선언이 시작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동안은 반공 일변도의 자유진영 최첨단 보루로서의 전략적·안보적인 위치 때문에, 우리 외교도 자유세계에 한정되어 있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친 국제사회의 변화, 즉 아프리카 등지에서 20여 개의 신생국가들이 생기고 UN의 판도가 달라지고, 베이징에서 이루어진 헨리 키신저의 미·중 대화가 결국 미·중 간의 화해로 발전했다. 그리고 닉슨 대통령의 방중이 있었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서 6·23선언 후에 우리의 공산세계에 대한 접근이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 때 신현확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의 소련 방문이 있었다. 그때는 세계보건기구(WHO) 총회에 참석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1978년 9월 6일부터 12일까지 소련에서 열렸던 WHO회의에 참석을 했고, 그 후에 세계정치학회가 1979년 8월 12~18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리고 이범석 장관이 1983년 6·23선언 선포 10주년을 맞이해서 국방대학에서 연설을 했다. 이건 거의 랜드마크인데, 이때 “앞으로 우리 외교가 풀어나가야 할 최대 과제는 소련 및 중공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북방정책의 실현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으로 우리 외무당국자가 북방외교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설 속에서 이범석 장관이 “남북관계가 정상화되면 북방정책은 자연히 실마리가 풀려 나간다. 북방정책의 진전은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 하나의 선전구호처럼 “평양으로 가는 길은 직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베이징, 모스크바를 경유할 수 있다”는, 즉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통해서 평양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고 왜 북방정책이라고 표현했는지를 그 연설 속에서 풀이했다. “사실 북방정책이라고 하는 용어는 대공산권정책과 거의 같으나 공산권이라고 하는 용어가 국제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역시 부적절하다. 그래서 동서 대립이라는 대결적인 개념을 뛰어넘어서 좀더 부드럽게 말하기 위해서 북방정책이라 한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소련에 대한 접촉을 시도했다. 

- 장관님께서 소련 근무를 시작하실 때 영사처장이랑 직명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이렇게 낯선 직명을 사용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1989년 11월 한·소 간에 영사처 설치에 합의하고, 이를 통해 양국 관계·교섭을 시작하기로 한 배경 내지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

▲ 양 국가가 합의에 의해서 국교를 이루면 바로 외교관계 설립으로 넘어가는 게 정상적인 상황인데, 이 시점에는 남북 간의 대립이 있었고, 또 그동안 북한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중국도 문제가 됐다. 중국으로서는 남북 관계가 대립관계에 있는데 바로 뛰어넘어서 자기들이 지원하고 있는 평양 정권의 경쟁상대인 남한과 외교관계를 가지기가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실질적으로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은 필요성에 따른 우회적인 방도였다고 생각이 된다. 

처음에 우리가 영사사무소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당시 최호중 장관이 영사 사무소라 하면 왜소하게 보이니까 처라는 말을 붙여 영사처라고 했다. 영어로는 컨슈러오피스라 했다. 그러나 정식 영사관계라고 하긴 좀 어렵다. 유사영사관계였다. 비엔나 영사협정에 따르는 일정한 특권은, 사무소에 대한 불가침, 어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서비스, 물품 구입에 있어서는 면세를 인정했다. 소련 측이 제한적으로나마 그러한 특권을 인정하면서도 정식 명칭의 사용에는 인색했기 때문에 유사영사관계를 가졌다. 

한편 우리 정부로서는 그 당시 소련과 첫 공식관계를 갖는 출발이니까 인사 구성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 영사나 부영사급을 보내서 업무를 관장시키기에는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시니어급 인사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그때 노재원 차관과 당시 임동원 외교안보연구원장, 당시 주뉴욕총영사였던 저, 이렇게 세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특히 당시 임동원 원장은 이북에 있을 때 어느 단계까지는 러시아어도 공부했기 때문에 최적임자라는 이야기들도 있어서 추천을 했는데, 두 사람 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않겠다고 했다. 저는 밖에 있고, 뭐 전화를 걸어서 그에 대한 협의할 대상도 못 되는 상황이라, 두 사람 못 간다니까 나를 결정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발표하기 전에, 또 저도 통보받기 전인 1989년 12월 24일에 신문에 보도됐다. 크리스마스 전야인데, 그날 사무실에서 들어가는 도중에 통신실에서 전화가 왔다. 통신사가 제게 『조선일보』에 주소영사처장으로 발령이 났다고 전했다. 그리고 월요일 오후에 보니까 장관 편지가 파우치 속에 들어 있었다. 전보를 치기에는 인사 보안상 좋지 않으니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조선일보』가 특종으로 보도해서, 말하자면 신문 발령, 지상 발령을 받게 됐다. 모스크바 영사처에 가게 된 배경이 그랬다. 그 시점에서 제 개인의 희망은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준비 과정을 거쳐서 서울에 들어왔다. 들어와서 임명장을 받는데, 보통 아시다시피 총영사의 경우에는 신임장이 없고 임명장을 받는다. 요새는 외무부 장관이 주는데, 이전에 한때는 임명장을 국무총리가 줬다. 그런데 당시 예외적으로 청와대에서 바로 임명장을 주겠다고 해서 청와대에 올라왔다. 대통령께서 임명장을 주시고 장관도 옆에 배석하는 등, 대사 신임장 주는 격식으로 받았다. 신임장 수여식이 끝나면 관례적으로 대통령하고 담소하면서 차를 나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연내에 모스크바를 구경시켜 달라는 말씀을 했다. 

- 수교를 꼭 이루라는 말씀인가?

▲ 그렇다. 그래서 당시에는 순간적으로 “거창한 국가 대행사인데, 관광사업인가”하고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만큼 노태우 대통령의 대소 국교정상화에 대한 강한 집념이 반영됐다. 그래서 그 약속을 결국은 제가 실현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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