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죽음은 한편으로 아주 그럴 듯했다. 그는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다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커피잔을 떨어뜨리곤 포만감 있는 곡선을 그리며 뒤로 쓰러졌다.
“아니야, 결국은 과로가 녀석을 죽인 거야” 그의 절친한 동료였던 김인수가 병원 벽을 치며 울부짖듯이 외쳤다.
“그놈이라고 무슨 커피를 그렇게 좋아했겠어. 다 피로를 이기려고 자꾸만 마셔댔던 것뿐이야.”

“이것도 다 팔자소관이야. 죽은 오영우 씨에겐 안됐지만 잠깐 현기증이 일어났던 것뿐이라고. 하필 뒤로 엎어진 곳에 철제 캐비닛이 있었던 게고.”
부서의 상사인 배 과장이 다가와 위로랍시고 말을 걸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인수는 갑자기 눈에 핏발을 돋우더니 배 과장 멱살을 붙잡고 을러댔다. “너도 사용자다, 이거지. 부하 직원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가 죽었으면 위로는 못 해 줄망정 잘 죽었다고 말을 해!”

“이봐 이거 왜 이래!” 배 과장이 숨이 막혀 컥컥대며 팔을 내저었다. 그제야 사태를 눈치챈 사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인수를 떼어놓았다. “이거 놔! 너희도 다 한편이지!”
깡마른 몸집의 인수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서너 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메다 꽂듯이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직도 몸 안에 남아 있는 분기가 아직 분출되지 않은 듯 허공을 올려다보며 사자 울음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동료들은 저러다 미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눈길로 인수를 바라볼 뿐 이제는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날 이후로 사원들의 관심은 인수가 언제 사표를 낼 것인가 하는 점에 집중되었다. 직속상관인 배 과장의 멱살을 움켜잡아 놨으니 그가 온전히 회사 생활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고 또 자신도 승진 희망 같은 게 다 사라졌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으니 회사를 떠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도통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수는 너무나 뻔뻔하게 회사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 과장에게도 싹싹하게 잘했고 오히려 오영우가 죽기 전보다 훨씬 모범적인 사원으로 변모했다. 모욕을 당했던 배 과장마저도 그 일이 생시에 있었던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인수의 속마음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서 굴욕적인 회사 생활을 계속해 나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영우의 죽음이 못내 마음에 걸렸고 거기에는 또 그만한 이유도 있었다. 영우와 인수는 둘 다 총무과에 근무하고 있다. 회사 내의 실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자리였다. 최근의 불황과 더불어 자금 사정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라 수익금의 일부가 증발하고 있는 낌새를 영우가 눈치챘다. 영우는 신중한 성격대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인수도 그동안의 조사를 토대로 회사의 윤 상무가 자금을 빼돌리고 있으며 그 하수인은 배 과장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는 영우의 눈을 속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죽인 것일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유 공작도 한 번 벌이지 않고 사람을 덜컥 죽인다는 것은 윤 상무나 배 과장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아.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만한 배짱을 가지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영우의 손길을 피해야 하는 뭔가가 있었어. 인수는 그 점에 확신했다. 말하자면 영우가 결재해야 하는 사항의 일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렇다면 사건은 좀 더 확실해진다. 영우는 최근에 부동산에 대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기라면? 그 건은 영우의 후임이 된 배 과장의 충복에 의해서 이미 사장에게 결재가 올라가 있다.
인수는 그때야 그날 병원에서 한 배 과장의 말이 의미심장했음을 깨달았다.

다 팔자소관이야. 죽은 오영우 씨에게 안됐지만 잠깐 현기증이 일어났던 것뿐이라고. 하필 뒤로 엎어진 곳에 철제 캐비닛이 있었던 게고. 그렇다. 그들은 죽일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영우가 좀 다쳐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니 단지 쓰러져 주기만을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얼마나 인자하고 너그러운 상관인 양 특별 휴가를 내어주고 푹 쉬고 오라고, 일이 인생 전부는 아니라고 하는 등의 사탕발림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영우가 돌아왔을 때 그 부동산 건은 이미 처리된 후였을 것이고.

인수는 이미 회사에 대한 미련 따위는 없었다. 그 일이 어떻게 되든 사장에게 가서 알려주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오직 복수하고 싶었다. 따라서 그들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을 살인자에서 사기꾼으로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골목길에서 칼을 들고 윤 상무나 배 과장을 잡아 죽이려고 기다리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식인이었고 양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고 배 과정이 도대체 어떤 수법으로 영우를 쓰러뜨린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커피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것은 증명되었고 배 과정은 영우가 쓰러질 때 멀찍이 있었다.

영우는 커피광이라 불릴 만큼 커피를 좋아했다. 사무실에 있는 커피 재료도 그가 개인 돈을 털어 사다 놓은 것이었다. 커피는 회사에서 나왔지만.
인수는 자신이 쳇바퀴에 걸려든 다람쥐 같다고 생각됐다. 공기 속으로 증발한 돈을 찾아 영우의 죽음을 밝히려고 하는 다람쥐.
그때 문득 인수의 뇌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증발!

그는 배 과장이 과거에 제약회사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옛 고교 동창인 시경의 강 형사를 찾아가 그의 추리를 말해 주었다.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오영우라는 친구가 커피를 마시기 직전에 배 과장이 커피메이트 옆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가?”
강 형사의 질문이었다. “분명하지. 나는 그자가 커피를 마시려는 줄 알았지. 실제로 커피를 따르긴 했지. 하지만 그 자는 커피를 싫어한단 말이야. 그리고 바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영우가 커피를 마시러 왔지. 사실 그 친구는 누군가 커피를 따르기만 하면 자극받은 듯이 일어나 커피를 마셨단 말이야. 배 과장은 그 점까지 노린 게 틀림없어”

“흥미로운 이야기야, 조사에 들어가지. 증발의 미스터리라.”
시경으로 소환된 배 과정은 곧 겁에 질려 진상을 밝혔다.
 

퀴즈. 그 진상은 무엇일까?

 

[답변-4단] ] 배 과장은 커피메이커에 에테르를 부었다. 그 뒤를 바로 따라온 오영우는 그걸 모르고 커피를 부었다가 그 마취제의 냄새에 현기증을 일으켜 쓰러진 것. 그러나 정말 재수가 없게 뇌진탕을 일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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