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에 비유했다. 영국 시인 블레이크의 시집 ‘밀턴’에 나오는 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칼 폴라니는 ‘악마의 맷돌’이란 표현을 통해 시장경제의 톱니바퀴 속에서 증발해 버리는 인간의 삶에 대해 경고한다. ‘악마의 맷돌’은 인간의 삶과 가치를 분쇄해 버리는 통제할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시대의 위기를 상징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흔히 짐작했을 악마적인 인물이 아니라 지시에 순응하는 ‘평범한 관료’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범죄와 사건들이 실상은 얼마나 어리석은 타성에 의해 벌어지는 것인가를 갈파할 때 주로 동원되는 말이다.

인간적인 것과 가치를 갈아버리는 ‘악마의 맷돌’이나 일상에서 수시로 목격 가능한 ‘악의 평범성’도 옛말이고 식상하게 들린다. 대한민국은 이들 매력적인 단어를 대체할 ‘악의 인센티브’가 횡행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올바른 삶을 살았던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 삶 때문에 작은 실수에도 더 큰 비난을 받는다. 평생을 쌓아 온 명예가 단 한 번의 실수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는 한다.

대한민국에서 잣대는 일정하지 않고 기준은 언제나 자의적이다. 늘 나쁜 짓 하던 놈에게는 “원래 그런 놈”이라는 욕도 아까워 다들 침묵한다.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자신은 그 몇 배의 시세 차익을 올리면서 대통령 아들이 6년 동안 2억을 벌었다고 비난해도 누구도 그 국회의원을 탓하지 않는다. 대통령 아들은 실제 거주했다고 구차한 반박을 해야겠지만, 그 국회의원은 자기 아파트에 대해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다. 그가 욕먹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딸을 대학에 보내는 과정에서 특례입학 논란, 논문 제1저자 의혹, 표창장 위조 혐의 등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반면 개교 이래 처음 감사를 받았다는 연세대 이경태 교수는 부총장 재임시절 딸을 입학시키기 위해 교수들을 동원해 서류심사와 구술시험 점수를 아예 조작했다. 이경태는 조국 사태 당시에 아빠찬스 운운하면서 퇴진운동을 벌였던 정교모라는 단체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사회는 조국은 저질렀을지 모를 죄에 대해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나을 정도로 혹독한 대가를 받아냈지만, 이경태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조국은 평소에 정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 왔고, 이경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조국에 대해서는 “네 놈이 그러면 그렇지”, “너도 별수 없는 놈이구나”라는 욕을 던지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적 분노, 위선적 잣대, 선한 자는 백번 잘해도 단 한 번 잘못하면 아웃되고 마는 페널티를 떠안아야 하는 세상에서 어떤 미련한 자들이 선한 삶을 살아가려 할지 궁금하다. 악한 놈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라고 넘어가는 ‘악의 인센티브’가 작동하는 한 대한민국은 ‘악마의 맷돌’이 굴러가는 사회이고, ‘악의 평범성’이 일상화된 사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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